그 꽃이 내 얼굴을 닮았구려! ?
그 꽃이 내 얼굴을 닮았구려! ?
  • 송란교
  • 승인 2020.08.31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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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란교 / 성동신문 논설위원

 

송란교 / 성동신문 논설위원
송란교 / 성동신문 논설위원

봄이 오는 발자국소리를 귀 쫑긋 세우고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서두른다. 푸르딩딩한 봄날의 채소들을 시장에서 파는 것만 맛보기에는 입이 너무 껄끄러워 한다. 

 그래서 녹색채소들을 집안에서 직접 길러 보고 싶었다. 흙의 기운도 온 몸으로 받고 싶었다. 하천 부근에서 개미들이 침 흘리며 잘게 부수어 놓은 기름지고 찰지고 고운 흙을 하루에 한소쿠리씩 일주일 동안 집으로 퍼 날라 왔다. 

 조그만 상자 3개를 준비하고 그 흙을 시골에서 가져온 퇴비와 화학비료 등을 양념 버무리듯 뒤섞어 그 상자 안에 가득 채웠다. 
 시장에서 사온 고추, 가지, 호박. 상추 모종을 골고루 나누어 심고, 옥구슬 같이 바싹 마른 옥수수도 몇 알 묻어두었다. 그리고 그 상자를 햇볕이 들어오는 거실 창문 쪽에 늘어놓으니 시골의 밭이 통째로 이사 온 듯하였다. 날마다 물을 주고 눈길을 주니 옥수수의 싹이 아장아장 솟아났다.  

 옥수수는 자라는 속도가 무척 빠르지만 줄기가 굵어지지 않아서 심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솎아냈다. 
 상추는 잎사귀가 손바닥 크기로 자라서 쌈 한 끼 해결하고 뽑아냈다. 
 고추는 수많은 진딧물과 힘든 싸움을 하면서도 하얀 꽃을 피우더니 고추가 제법 주렁주렁 매달렸다. 
 가지는 꽃은 피는데 몽우리가 생기지 않고 그냥 시들었다. 가지가 하나라도 열리기를 기대하며 정성을 들였으나 네 번째 꽃이 피었다가 그대로 시들어버렸다. 

 호박은 넝쿨이 위로 올라가는 속도가 상상을 초월했다. 하룻밤 사이에 한 자 정도 길어지고 금방 천장을 뚫으려 했다. 보름 정도 지나니 천장을 이고 있기가 버거운지 시든 수염들이 밑으로 흘러 내렸다. 잎은 무성한데 꽃을 피우지 못하고, 넝쿨은 기댈 데 없는 창문을 기둥삼아 스프링처럼 꼬불꼬불 길게 꼬여만 갔다. 그래도 넓적한 호박잎은 입맛 댕기는 된장국 재료로 사용할 수 있었다. 

 거실에 놓아두면 햇볕을 받는 양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수분(受粉)작용을 할 수 없어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고추가 그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청양고추를 심었기에 그 작은 고추는 혀끝에 닿는 순간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로 심하게 매웠다.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고추 하나 맛보다가 온통 땀으로 목욕을 해야 했다. 

 호박 넝쿨이 온통 창문을 뒤덮어서 창밖의 고운 하늘을 볼 수 없었지만 오뉴월 따가운 햇살을 막아주어 시원한 여름을 보낼 수 있었다. 푸른 색동옷을 날마다 갈아입는 그들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눈이 편했다. 

 3개월 정도 아파트 거실을 원두막처럼 꾸며 놓고 밭농사 짓는 시늉을 하면서 시골스런 흙냄새와 푸른 채소들이 피워내는 맛있는 향기를 마음껏 누렸다. 
 누런 호박도 분홍빛 가지도 소출은 없었지만 호박잎을 따서 한 끼를 해결하고 가지 꽃을 보면서 한 시간씩 즐겼으니 이만하면 마음부자로 호사한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들을 정성들여 어루만지고 가꾸다 보니 나의 얼굴이 그들이 피워내는 꽃을 닮아가고 있었다. 
 농작물은 주인의 발길 소리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꽃을 보고 있으면 그 꽃에 투영되어지는 나의 얼굴도 한 송이 꽃이었다. 
 밝은 대낮에 순한 햇살과 맑은 공기를 먹고 자라면 해맑은 꽃이 필 것이고 어둠속에서 칙칙한 것만 먹고 자라면 어둠의 꽃이 필 것이다. 
 밝은 생각을 먹고 자란 얼굴은 아름답게 활짝 피어있는 꽃처럼 뭇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고 어두운 생각을 먹고 자란 얼굴은 섬뜩한 독버섯처럼 몸에 닿으면 두드러기 올라올까 두려워 멀리 피하려 할 것이다. 

 부부의 얼굴은 닮아간다고 한다. 이는 생각하는 방향이 같고 함께 먹는 음식이 같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시간이 많고 마음이 하나로 모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얼굴을 꼭 닮은 다른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아름다운 꽃은 누구를 위해 피어날까? 꽃은 스스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다만 향기를 내뿜어 내가 그곳에 있음을 알릴뿐이다. 우리들은 그 향기를 나침반 삼아 그 꽃을 찾아갈 수 있다. 

 오렌지를 짜면 오렌지주스가 나온다. 그 주스는 오렌지에서 나온다. 나만의 색깔 나만의 향기 나만의 당당함을 먹고 자란 나만의 꽃은 누굴 닮았을까? 나만의 독특함이 나만의 향기가 될 것이다. 나를 닮은 그 꽃이 나를 보면서 방긋방긋 싱글벙글 웃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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