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테네 가는 배(17.끝)
<소설> 아테네 가는 배(17.끝)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9.09 19: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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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소성 / 성동문인협회 고문
정소성
정소성

그들은 차에서 내리는 일행을 보고는 적이 놀라는 표정이었다. 엘리자베드는 한 사람씩 소개했다. 그리스말이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인사를 주고받는 분위기는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콧수염의 노인은 주하의 손을 잡고 놓을 줄 몰랐다. 몇 번이나 주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그들은 집 안으로 인도되었다. 집 안은 겉에서 보기와 달리 어둠 속이었지만 넓고 잘 정돈되어 있었다. 항구의 밤부두에서 기적소리가 뚜우~ 들려왔다.
테살로니키는 지리적으로 발칸의 제일 요충이다. 에게해에서 발칸으로 진입하기 위한 관문 구실을 하고 있다. 게다가 발칸의 동서를 잇는 지점이기도 하다.
종식은 어둠을 헤치며 집 주위와 멀리 잠들어 있는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좁은 버스 안의 공간 속에서 경직되었던 근육을 풀어 보고도 싶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집 안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종식은 그들 꽁무니에서 여유 있게 어물쩍거리다가 급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주하가 엎질러진 물처럼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자신의 목발이 몸통 위에 팽개쳐져 있었다. 두 노인과 처제와 손녀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자세히 보니 주하는 넘어진 게 아니라 졸도해 있었다. 얼굴이 백지장처럼 핼쑥했다. 고옥의 처마에 켜진 외등 불빛에 비친 주하의 모습은 처참 바로 그것이었다. 엘리자베드는 성호를 긋고 합장했다. 종식은 달려들어 주하를 업었다. 그것은 절대 어른의 몸무게가 아니었다. 하나의 나무 등걸처럼 가벼웠다.
“왜 갑자기 졸도했습니까, 주하가?”
“…….”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경황이 없는 듯했다.
“잘 넘어지기는 해도 허약한 사람은 아닌데…….”
“사실은 주하의 부친이 오늘밤 여기에 오시기로 약속되어 있었소. 그런데 어젯밤 국제전보가 왔는데 너무나 노령이라 오실 수 없다는 거요. 평양에서 소피아까지 초음속기로도 만 하루가 걸리고, 시베리아 열차를 타면 보름이 걸리오. 난 또 급히 처가를 내일 떠나야 하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주하는 졸도를 했소.”
콧수염의 노신사는 과연 일생을 외교관으로 보낸 사람다웠다.
“그분의 여권을 발급받게 하는 데 내 힘으로도 만 2년이 걸렸소. 안된 일이오…….”
주하를 응접실의 소파에 눕혔다. 치켜올려진 바짓가랑이 밑으로 손가락같이 가는 다리뼈에 매달린 두 발이 드러나 보였다. 
엘리자베드는 그의 얼굴에 물찜질을 하고 찬물을 입에 떠 넣었다. 운전사는 마라차를 돌보느라 겨를이 없었다. 두 사람은 응접실 안으로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엘리자베드는 울고 있었다. 종식도 마음이 찡해져 왔다. 주하는 눈을 떴다. 그는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물을 찾았다. 찬물을 한 컵 다 들이켠 그는 할아버지를 찾았다. 노신사는 파이프를 빙글 한 바퀴 돌리면서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급히 떠나셔야 한다고 하셨지요?”
주하의 유창한 불어에 노인은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렇소. 주하가 깨어나면 지금이라도 떠나야 할 입장이오. 당 제일서기 각하의 부름이 있었소. 오, 나의 귀여운 알리! 너의 제일 귀한 친구가 이렇게 약질이니…….”
노인은 손녀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눈물을 흘리며 서 있던 엘리자베드가 할아버지의 가슴속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그러나 그 순간 주하의 상체는 벌떡 일으켜 세워졌다. 졸도한 사람답지 않은 몸놀림이었다.
“지금이라도……?”
그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곤 입고 있는 웃옷 안주머니를 마구 뒤졌다. 그는 조그만 꾸러미를 꺼냈다. 그것은 포장이 오래되어 터져 있었다. 백열등 불빛 아래 드러난 물체는 희디흰 여자의 머리채였다. 그리고 반대편 안주머니에서 뭔가 널찍한 천 조각을 꺼냈다. 흐르는 강이 수놓아진 자수 폭이었다.
“할아버지, 이것들은 오늘낼 하시는 우리 어머니의 것입니다. 이건 우리 어머니의 머리채이고, 이것은 두 분이 함께 살았던 황해도 북단 청천강 하류 송림 땅입니다. 우리 어머니의 시모이강이죠. 소피아로 돌아가시면 이것을 아버님이 운명하시기 전에 보실 수 있게 소포로 부쳐 주십시오.”
주하의 불어는 놀라울 정도로 유창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불어발음이 비통한 음조를 띤 채 떨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용산시장 어느 귀퉁이에서 남편의 얼굴을 닮은 병든 시동생을 간호하고 있을 백발 할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이 백발 할머니의 시모이강이 늙은 불가리아인 손으로 건네졌다.
“염려 말아요. 등기 속달로 부쳐 드리리다. 알리야, 이모 집에서 며칠 쉬었다 할머니 모시고 흑해 연안 내 별장으로 오너라.”
노신사는 떠날 준비를 했다. 마당에서 누군가가 흑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마라차였다. 트럭 운전사는 휠체어를 저편으로 끌고 갔다.
그 순간 무릎걸음으로 주하에게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이굉석 씨였다.
“주하, 나에게 맡겨! 그분이 그렇게 오래 기차나 비행기를 타지 않게 하고도 두 분올 만날 수 있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두 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핼쑥한 주하의 얼굴에서 유난히 총기에 반짝이는 그의 두 눈이 갑자기 빛을 발했다. 뜨거운 열판에 살을 덴 사람처럼 주하는 몸을 움찔거렸다. 그는 지팡이를 찾아 짚고는 몸을 추슬러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이굉석 씨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엘리자베드는 계속 울고 있었고, 니케는 방 한구석 소파에 앉아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식은 목구멍을 쥐어뜯는 갈증을 느끼고 방을 뛰쳐나갔다. 미칠 듯이 뛰는 가슴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어둠이 쌓인 마당 한구석에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뭔가 열심히 마라차에게 이야기하는 트럭 운전사의 우람한 몸집이 보였다.
에게해 밤부두에서는 먼먼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기적소리를 타고 아테나 여신의 빈방이, 앙드로마크의 시모이강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흘러갔다. 전설과 신화의 숲으로 뒤덮인 낯선 땅을 지팡이에 몸을 얹은 주하가 뛰고 있는 모습이 저 멀리 떠올라 보였다. <끝>

성동문인협회의 회원인 정소성 소설가의 중편소설 〈아테네 가는 배〉를 17회에 걸쳐 연재했습니다.
 〈아테네 가는 배〉를 애독하여 주신 성동신문 독자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호부터는 윤정 소설가의 《아줌마, 이모님, 할머니》를 연재 합니다.
성동신문을 사랑하시는 독자분들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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