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박의 기행 수필> 이집트 최고의 파라오 람세스 2세(상)
<김종박의 기행 수필> 이집트 최고의 파라오 람세스 2세(상)
  • 이기성 기자
  • 승인 2020.09.22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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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박
김종박

“람세스, 가장 위대한 정복자, 진리의 수호자인 태양왕.”

고대 이집트인들이 그들의 아름다운 상형문자를 신이 내려준 선물로 생각했던 바로 그 신성문자(神聖文字)를 해독함으로써 고대 이집트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준 장 프랑수아 샹폴레옹은 그가 진심으로 숭배했던 파라오 람세스 2세를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의 크리스티앙 자크가 지은 <<람세스>> 소설1권의 서문 모두(冒頭)에 나오는 말이다.

칠순 기념으로 외손자 송민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평소 가보았으면 하고 꿈꾸어 온 이집트 여행을 갔다.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부심벨의 4개 거대 좌상의 위용스런 모습과 멤피스의 누워 있는 거상으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는 람세스 2세(Ramses II)의 모습 등으로써 샹폴레옹의 그러한 표현이 정말 탁견이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이집트 여행에서 현지 가이드의 해박한 설명을 바탕으로 내가 보고 느꼈던 람세스 2세를 기려 보고자 한다.

먼저 그가 파라오가 되는 배경과 그 초창기를 본다.

다신교를 유일신 아문으로의 종교개혁을 실시하기 위하여 자신의 이름을 아크나톤으로 개명한 중왕국의 파라오 아멘호테프 4세(BC 1353~1336)의 재위기간이 끝나고 어린 파라오 투탕카멘이 후손 없이 스무 살이 되지 못한 채 일찍 죽게 된다. 그 자리를 늙은 재상이었던 ‘아이’가 투탕카멘의 왕비와 재혼을 하면서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늙다리 아이가 파라오의 자리에 오른 지 4년 만에 쿠데타로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 자리를 또 다른 권력자였던 호렘텝이 차지하였지만 그 역시 후손을 두지 못한 채 죽었다. 그 자리는 그의 오른팔이었던 재상 람세스 1세가 차지하게 되었다. 람세스 1세는 람세스 2세의 할아버지로 이집트의 신왕국인 제19왕조를 시작했으며 이집트인이 아닌 아시아계의 핏줄이 섞인 군인 가문이었다, 불행이도 람세스 1세 또한 왕좌에 오래 있지 못하고 재위 2년 만에 사망하게 되는데 다행히 그에겐 아들 세티 1세가 있었고 이어 세티 1세가 파라오가 됐다. 세티 1세가 파라오가 된 지 10년에 다시 왕좌는 그의 아들인 람세스 2세에게 넘어가게 됐고, 드디어 왕좌에 오른 절대 권력의 파라오! 그는 결국 신왕국 시대 이집트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파라오가 되었다. 원래 왕족은 아니었지만 권력을 잡은 람세스 집안은 아크나톤과 그의 계승자 투탕카멘 때 약해진 아시아 지역에서의 이집트 세력을 회복하는 과업에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착수하게 된다.

람세스의 아버지 세티 1세는 팔레스타인과 남부 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킨 제후들을 진압했고, 그 무렵 이집트에서 일어난 정치적 혼란으로 당시 이집트와 쌍벽을 이루는 강대국인 히타이트에게 넘어간 북쪽 지방들을 되찾기 위해 아나톨리아의 히타이트족과 싸움을 벌였다. 히타이트족과의 전투에서 세티 1세는 처음에는 약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이 승리는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고 말았다. 그의 집권 말기에 히타이트족은 오론테스 강 유역에서 강의 보호를 받는 튼튼한 요새 카데시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이곳을 그들의 남쪽 국경의 중심지로 삼고 있었다. 재위 동안 왕위 계승을 확실히 하기 위해 머리를 쓴 세티 1세는 후에 람세스 2세가 된 왕세자 람세스에게 섭정할 수 있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했으며 왕의 것에 비할 수 있는 궁전과 궁녀들을 마련해주었고, 전투 때마다 데리고 다녔기 때문에 단독 통치자가 되었을 때 람세스는 이미 왕으로서의 통치 경험과 전쟁 경험을 고루 갖출 수 있었다. 특히, 불과 10세 때 그는 군대 지휘관이 되었는데 상당한 군사 훈련을 받았다고는 해도 그 나이의 지휘관 직위는 분명 명예직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람세스 가문의 고향이 나일강 삼각주에 있었고 아시아 원정을 위한 편리한 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람세스 2세는 람세스의 집을 뜻하는 '피람세스'(성서에는 Raamses)라 부르는 대규모 주거도시를 지었다. 이 도시는 정원, 과수원, 멋진 폭포 등이 있는 아름다운 설계로도 유명하다. 사방에는 각각 주신(主神)이 있었는데 서쪽에는 아몬 신, 남쪽에는 세스 신, 북쪽에는 왕실 코브라 여신인 부토, 특히 동쪽에는 시리아의 여신 아스타르테가 있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아시아 신들이 유행했으며 람세스 2세도 이 유행을 따랐던 것이리라.

단독 지배자가 된 뒤 그가 취한 첫 번째 공적(公的) 행동은, 카르나크의 아몬 신이 장식배를 타고 룩소르 신전을 방문하는 행사인 오페트의 종교 대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남쪽에 있는 수도 테베를 찾은 것이었다. 그는 북쪽의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추진하다 죽은 뒤에 중단된 대신전 건설 사업을 재개하고, 오시리스 신을 경배하기 위해 아비도스에도 들렀다. 또한 시니스 근처 안후르의 최고 사제 네브웨네네프를 테베의 새로운 아몬 신 최고 사제로 임명하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 국민들의 눈에 람세스 2세가 카리스마 넘치는 위대한 왕으로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방대한 건설 사업을 하고 유명한 주거도시를 건설한 업적 이외에도, 아마도 주로 군인으로서의 대단한 명성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왕이 된 지 4년째 되던 해에 그는 아버지가 영영 되찾지 못했던 잃어버린 지방들을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거침없이 북쪽으로 갔다. 첫 번째 원정은 시리아 남부의 반역적인 지방 군주들을 진압하고 앞으로의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베이루트 근처의 알칼브 강에서 멈추었으며 비석을 세우고 이 전쟁의 여러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지금은 비문이 모두 비바람에 씻겨 단지 그의 이름과 날짜만 남아 있다. 그 다음해부터 본격적인 원정이 시작되었다. 목표는 카데시에 있는 히타이트족의 요새였다. 군대는 해안 길을 따라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을 지나 트리폴리 근처쯤 되는 아모르 땅 남쪽에 도착하여 멈추었다. 이곳에서 그는 특별 기동부대를 파견해 시미라 항구를 확보한 다음 엘케비르 강 유역을 따라가 카데시에서 주력부대와 합류하도록 했다. 오론테스 강쪽으로 계속 진군한 주력부대는 각기 5,000여 명의 전차부대와 보병부대로 이루어진 4개 사단으로 되어 있었다. 군대는 카데시에서 약 13㎞ 정도 떨어진 샤브투나 강 동쪽에서 서쪽으로 강을 건넌 뒤 숲을 지나 카데시 바로 앞 평원에 도착했다. 바야흐로 후세에 까지 유명한 전투로 남게 된 카데시(Qadesh) 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계속>

※김종박 선생님의 수필 <이집트 최고의 파라오 람세스 2세>는 (상, 중, 하)로 나눠 3회에 이어 연재될 예정입니다. 독자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애독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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