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아줌마, 이모님, 할머니 ③
<소설> 아줌마, 이모님, 할머니 ③
  • 성광일보
  • 승인 2020.10.28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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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 / 소설가
윤정 / 소설가
윤정 / 소설가

식기세척기가 익숙하지 않을뿐더러 깨끗이 씻기지 않는 느낌이라 손으로 씻고 있는데 편리할 뿐 아니라 소독도 되니 세척기를 사용하라고 한다. 
쌍둥이네서 하던 대로 대강 넣어놓으니 이모님 말씀이, 이렇게 넣은 걸 애 엄마가 우연히라도 보면 뭐라고 한다고 예쁘게 넣으란다. 세제 넣는 부분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하얀 가루가 묻어 있다. 이왕이면 액체 세제를 사용할 것이지, 그래서 세척기 쓰기가 달갑지 않다. 79분 돌리고 찜찜해서 한 번 더 돌리니 설거지에만 세 시간이 걸린다. 

9시 넘어 과일 깎아 물과 함께 내실에 놓고 나오면서 그때까지 아이들이 아무것도 안 먹었다는 것이 생각났다. 먹고 싶다고 해야 준다는 말에 잠시 기다리니 작은애가 짜파게티를 끓여 달란다. 

그까짓 거! 하며 끓여다 주니 맛있게 먹으며 간을 잘 맞췄다고 했단다. 정해진 용량에 맞춰 끓인 것뿐인데 맛있다니 칭찬은 칭찬이다. 
편하기도 하고 한편 불편하기도 하다. 아이 첫 식사가 라면이라니 양심에 찔린다. 어느 집이든 애들 먼저 챙기고 애들 중심으로 일을 했는데 이 집은 사장님 쪽으로 신경을 써야 한다니 앞날이 순탄치는 않겠다.

10시가 가까워져 주방 불을 끄고 나오려 하니 남자애가 들어온다. 
 “뭐 먹으려고?”
 “달걀 두 개하고, 식용유, 소금, 베이컨 좀 주세요.”
 “내가 해줄게.”

대답이 없이 뚝딱뚝딱 만들어 식탁에서 후다닥 먹고 나간다. 다음에는 내가 해 줄게 하니 네, 하고 달아난다. 달랄 때까지 아무것도 만들지 말라는 이모님 말대로 하다 보니 애들 저녁밥도 제대로 안 챙겼다.

원래 그렇다고 신경 쓰지 말란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치킨 시켜 달래서 먹는단다. 그러고 보니 주방 서랍에 쿠폰이 수십 장인데 거의 이틀에 한번꼴로 주문하면서도 써먹을 생각도 안 한단다. 

돈 많은 집에서 쿠폰이 대수랴. 희주는 어린아이들 속에 쌓일 포화지방이 자신의 배에 쌓인 지방보다 더 걱정이다. 
오늘의 할 일이 끝나고 욕실에 가서 씻는데 마음이 편치 않다. 어차피 입주로 남의 집 일하러 온 사람이 쓴맛 단맛 가릴 일은 아니지만 애들 중심으로 고정해 놓은 낮은 샤워기와 간유리로 반만 가려 놓은, 건너편 아파트 창문이 보이는 욕실 환경에 씻는 둥 마는 둥 서둘렀다.

아이 침대 아래 매트를 깔고 누워 잠을 청하는데 두 시간이 넘도록 잠이 오지 않는다. 달라진 환경인 탓도 있지만 밖에서 친구와 게임을 하며 큰 소리로 대화하는 남자애 때문이다. 
도우미 처지에 조용히 해달라는 말도 못하고 자장가라도 삼자며 잠을 청하다가 겨우 잠이 들었는데 습관대로 5시 30분에 눈이 떠졌다. 집에 있다면 7시간은 자야할 사람이 겨우 4시간 눈을 붙였다. 밖이 밝아 오는데 늦잠을 잘 수도 없다. 

이런 수면 시간이 계속 된다면 오래 못 버틸 것 같다. 아침형 인간 희주에게는 잠이 보약이다. 이모님도 옆 방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한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잠 좀 잤어요? 애들이 학교 갈 때는 5시에 일어나야 하지만 요새는 안 가니까 더 자도 되는데.”
 “아무리 늦게 자도 일찍 눈이 떠져서 더 못 자요. 그런데 큰애가 늦도록 게임을 하던데 매일 그래요?”
“요즘 학교 안 가니 더 그렇고 엄마가 호통치면 조용히 하다가 들어가긴 해요. 나도 저 시키 땜에 못 잤어요. 아침에 시원할 때 다림질이나 하지요?”

안주인과 면접 때 하루에 다림질할 것이 서너 개 정도 있다고 했다. 애들 교복이냐고 물었더니 아니라 해서 와이셔츠냐고 하니 다 세탁소에 맡긴다고 하더니 안주인 옷인가?
거실 구석에 놓인 다림판 위에 남자 속옷이 놓여 있었다. 사각팬티 두 장, 민소매 러닝셔츠 두 장. 누가 속옷을 다린다는 말을 들었어도 설마 했는데 이제야 실물을 영접하게 되었다. 희주가 남자 속옷을 다릴 줄이야 누가 알았으랴, 입주 가사도우미로 일하게 된 것만큼 놀라운 일이다. 이모님이 시범을 보인다고 사각 하나와 민소매를 다리는데 실내복이나 마찬가지니 주름진 밑단만 잘 다리면 된다고 쓱싹쓱싹 시범을 보인다. 

입주한다고 애들에게 선언하고 나올 때 남자 속옷을 다리게 될 줄 짐작이나 했을까마는 돈 벌러 나왔지 자존심 세우러 나왔나 생각하며 애써 태연하게 다림질을 했다. 
사장님 참 유난스럽네. 실내에서 품위 있게 입지는 않더라도 속옷 차림은 아니지 않는가. 그걸 보다 못한 이모님이 다림질을 시작했는지, 다려달라고 하달을 했는지 모를 일이다. 입식 스팀 다림질만 했지 십수 년간 좌식 다림질을 한 적이 없는 희주는 결국 다리에 화상 자국을 남기고 말았다. 선견지명이 있는 큰애가 챙겨준 화상연고가 기다렸다는 듯이 반겼다. 

 “오늘 둘 다 운동을 간다고 하니 깨 좀 볶읍시다.”
 “네?”
 “깨를 다 먹어가니 깨를 볶으라고요.”
 “아, 네.”
 “난 마트 가서 장 보고 올 테니 이 깨 볶아 놔요.”

이모님이 내놓은 2리터 페트병에 담긴 깨는 잡티 없이 깨끗해 보였다. 집에서 잡티 많은 깨를 씻어 볶은 다음 소금을 섞어 빻은 경험이 있기에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쉽게 생각했다. 세 번에 나누어 볶은 다음에 마지막 볶은 깨에 소금을 넣고 갈아 깨소금을 만들고 나머지는 따로 냉장고에 보관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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