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수영장 풍경
<수필> 수영장 풍경
  • 성광일보
  • 승인 2020.11.11 11: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배경아 / 수필가
배경아

아쉬운 새벽잠을 물리치고 집을 나섰다. 가로등이 밤새 동네를 밝히느라 힘들었던지, 피곤함에 지쳐 축 늘어져 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는데도 옷깃을 여미고 바삐 걸어가는 아줌마와 마을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두어 명이 보인다. 저들은 무슨 연유로 이렇게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지 사연이 궁금해진다.

어두운 바깥과 달리 수영장은 입구부터 대낮처럼 환해서 잠이 확 달아난다. 수영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샤워장은 시끌벅적하고 뜨거운 물줄기는 사람들의 머리로, 어깨 위로 쏟아지며 뿌연 안개를 만들었다. 수영장 안으로 들어가니 여기저기에서 물살이 꿈틀거리며 소용돌이친다. 수업 시작 전에 몸을 푸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물살이다.

우리 레인에는 수영을 시작한 지 한두 달 되는 사람들이 주를 이룬다. 강사가 자유형으로 시작해서 배영으로 돌아오라고 말하면 일정한 간격으로 일사불란하게 출발한다. 
나를 포함한 두세 명은 아직 자유형 연습이다. 초급, 중급레인은 우리와 실력 차이가 상당하다. 십 년 넘게 다닌 사람들도 많단다. 나는 아직도 퀵 판을 잡고 쩔쩔매는데 물속에서 자유스러운 그들이 존경스럽다. 머리가 물속으로 하강하면 엉덩이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가 순식간에 곡선을 그리며 숨어버린다. 처음부터 물속에서 살았던 것처럼 너무 쉽고 자연스럽다. 빠르고 유연하게 헤엄치는 그들이 한없이 부럽다. 수업 후반기쯤 되면 고급 레인 쪽에서는 날렵한 몸매의 사람들이 줄지어 점프대로 이동한다. 그 모습을 볼 때면 사람의 몸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하나 둘, 펭귄처럼 물속으로 냅다 꽂히면 하얀 물방울이 세차게 사방으로 튕겨 나가는데 그 순간의 모습은 예술작품 같다는 생각이 스친다. 사람도, 물방울도, 수영장을 가득 채운 물도….
나는 언제나 25m를 완주해볼 수 있을까? 그런 날이 올까? 그냥 가라앉지 않고 레인 끝까지 가보고 싶다. 반드시 하고야 말리라고 다짐해 보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오늘도 별 진전 없이 강습을 마쳤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련다. 언젠가는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물속에서 놀다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된단다. 꼭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 레인에 나와 같이 시작했던 카자흐스탄 처녀는 수영도 잘하는데 얼굴도 몸매도 빼어나다. 
어느 날 내게 “수영이 너무 재미있어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웃기만 했을 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수영이 재밌었던 적은 없었고 단지 정복해야 할 정상이어서 올려다보면 너무도 까마득할 뿐이다. 자유형으로 배영으로 완주하고 난 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반환점에서 다시 출발하려는 사람들이 부럽다.

수영복 입은 모습이 젊은 사람 못지않게 탄력이 넘쳐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은 얼마나 하셨냐는 나의 물음에 “수십 년”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부러움이 담긴 나의 눈길에 할머니는 다정한 미소로 화답했다. 나는 저 할머니를 본받으련다. 지금은 잘못하지만 일흔이 넘어도 수영장을 찾으며 건강을 다지리라.

주말의 수영장에는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이 꽤 많다. 딸과 아들을 데리고 온 젊은 아버지는 아이들을 양팔에 완장처럼 매달고서도 가볍게 물속을 걷는다. 남매는 아버지에게 매미처럼 매달려있다가 저희끼리 수영을 하기도 한다. 허리와 양팔에 보조기구를 달고 물고기처럼 헤엄을 치는데 그 모습이 꿀벌 해치(만화 영화의 주인공)가 물 위로 내려와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번은 할머니와 증손까지 4대가 수영장에 온 것을 보았다. 가족들이 함께 물속에서 노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떤 부부는 모임에서 왔는지 레인을 완주하고 숨을 고르며 담소를 나누다가 함께 경주하듯 수영을 즐긴다. 

오늘은 할아버지가 함께 온 손자에게 수영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또 어린이 수영장에는 손자와 함께 온 할머니도 있었다. 할머니는 80대로 보였고 손자를 챙기며 함께 수영하다가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지 손자를 앞세우고 돌아가는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개구쟁이처럼 보이는 아들을 데리고 온 젊은 부부는 수영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아빠가 먼저 출발하면 엄마도 재빠르게 뒤따른다. 방실한 엉덩이가 물 위로 솟았다가는 급하게 물속으로 숨는다. 아들도 물장구를 치며 나를 추월해 간다. 물개처럼 종횡무진이던 아이가 저만치서 엄마에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소곤거렸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돼.”하고 엄마는 아이를 나무랐다. 나는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짐작이 간다.

“얘야, 몇 달 뒤에 보자꾸나. 이 아줌마가 멋지게 완주하는 모습을 보여줄게. 그땐 자유형으로 가서 배영으로 돌아올게.”하고 속으로 중얼거려 본다.
이렇듯 가족끼리 수영하는 모습은 본인들도 재밌겠지만 보는 이들에게도 즐거움을 선사한다. 나도 수영을 잘하게 되면 손녀와 딸을 앞세우고 수영장을 자주 찾으리라.

큰딸은 얼마 전 간이 수영장을 중고로 샀다. 공기를 주입해서 물을 담아 쓰는 것인데 폭이 좁아 아쉬웠지만, 손녀의 개인 수영장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간이 수영장 속에서 손녀는 이리저리 다리를 저으며 양팔로는 헤엄치는 흉내까지 낸다. 기분이 좋은지 얼굴이 마주칠 때면 방긋 웃기도 한다. 손녀가 수영을 즐기는 모습에 어른들이 더 좋아했다.

수영을 좋아하는 손녀가 우리 집에 왔길래 욕조에 물을 채워 넓은 수영장을 만들어 줬더니 아주 잘 놀았다. 힘들까 봐 20분 만에 꺼냈는데 더 놀고 싶었던지 막무가내로 울어대서 곤욕을 치렀다. 다음날 다시 수영장을 만들어 주었더니 어제의 분풀이라도 하는지 힘차게 발길질하며 앞으로, 뒤로 왔다 갔다 한다. 손녀는 운동신경이 좋은 것 같다. 무엇보다 물을 무서워하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나도 다른 이처럼 손녀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고 싶다. 네 살이 되어야 수영장에 입장할 수 있다 한다. 이제 백일이 갓 지났으니 아직 멀었구나 싶어 한숨이 나오지만, 아이들은 빨리 클 것이다. 딸과 함께 손녀랑 수영장에 다니려면 힘들어도 부지런히 연습해야겠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손녀를 보면서 기필코 수영을 정복하고야 말리라 주먹을 불끈 쥐어 본다.

<배경아 프로필>
·경북 예천군 출생
·안동대학 가정학과 졸업
·광진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광진문인협회 회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특별시 광진구 용마산로128 원방빌딩 501호(중곡동)
  • 대표전화 : 02-2294-7322
  • 팩스 : 02-2294-732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연
  • 법인명 : 성광미디어(주)
  • 제호 : 성광일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336
  • 등록일 : 2010-09-01
  • 창간일 : 2010-10-12
  • 회장 : 조연만
  • 발행인 : 이원주
  • 자매지 : 성동신문·광진투데이·서울로컬뉴스
  • 통신판매 등록 : 제2018-서울광진-1174호
  • 계좌번호 : 우체국 : 012435-02-473036 예금주 이원주
  • 기사제보: sgilbo@naver.com
  • 성광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성광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gilbo@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