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토끼풀꽃
<수필> 토끼풀꽃
  • 성광일보
  • 승인 2020.12.03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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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이

2020년 1월 말, 갑자기 들이닥친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발생으로 제대로 봄을 즐기지도 못하고 성큼 초여름을 맞이하였다.
사회적 격리, 자가 격리. 확진자, 생활적 거리 두기 등 생소한 단어가 생활 속으로 파고든 어두운 인간의 세상과는 달리 겨울이 물러나기 바쁘게 자연은 어김없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 아름다운 봄을 선물하였다.

새 움이 트는가 하였더니 어느새 꽃이 피고 조랑조랑 열매를 매달았다.
꽃구경도 마음 놓고 할 수 없었던 올해의 봄은 오히려 다른 해 봄보다 더 꽃들은 화사하게 피었고 신록은 더욱 더 눈부시도록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4월에 예약한 북유럽 여행도 취소되어 버렸고 혹시나 하고 기대하였던 7월의 중앙아시아 여행도 아무래도 올해는 어려울 것 같다.
해외로 나가기는커녕 지방으로 여행가기도 조심스러운 요즘 나는 집 앞의 한강공원을 내 집 정원처럼 자주 찾아 갔었다.

양지 바른 곳에 연약한 풀꽃이 피어 강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애처로우면서도 기특하고 고마워 무릎을 꿇고 눈 맞춤을 하였다.
며칠 전만 하여도 매 말랐던 산수유 가지에서 노란 꽃망울이 통통 튀어 올라 밤새 팅커 벨 요정이 요술 봉을 흔들고 갔을까 상상하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봄비가 솔솔 뿌리고 지나간 다음 물오른 나무 가지에서 싱그러운 향기가 났다.
아기 손 같은 어린 단풍잎에 맺힌 빗방울은 금강석처럼 반짝이고 영롱하였다.
매화가 수줍게 피더니 이어서 살구꽃, 벚꽃, 복사꽃이 앞 다투어 피기 시작하였다.
한꺼번에 봄꽃이 피지 않고 하나씩 차례로 피면 얼마나 좋을까?

짧은 기간 안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하는 자연의 섭리를 무시하고 어리석고 이기적인 인간의 잣대로 바라는 나를 보고 피식 웃음이 나왔다.

뭉게구름처럼 수많은 꽃잎을 달고 있는 나무를 바라보면 어쩌면 나무들도 순산을 한 산모처럼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살며시 안아 주고 싶었다.

어느 늦은 봄날 오후 제 소명을 다하고 떨어져 하얗게 쌓인 꽃잎을 바라보면 내년 봄에도 저 꽃들은 화사하게 피어나겠지? 나는 주름이 하나 더 늘어날 테고....

아니 어쩌면 내년에 피는 봄꽃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미래에 대한 알 수 없는 불안감과 함께 주어진 오늘 하루를 더 소중하고 진하게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런 다짐을 하였지만 점점 약해지는 건강이 나를 흔들리게 하였다.

나름대로 열심히 운동도 하고 골고루 영양소를 섭취한다고 하여도 흐르는 세월 속에 내 신체는 점점 쇠약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난해에는 눈물샘이 막혀 눈물샘 길을 여는 수술을 하였지만, 여전히 눈물은 밖으로 흐르고 눈가가 지저분하여 염증이 자주 생겼다.
나이가 들면 그러려니 .... 하고 병과 친구하며 살아야 된다고 하였지만 이곳저곳이 자주 고장 나고 아파서 일상생활을 순조롭게 할 수 없었다.

며칠 전 우연히 왼 손목의 핏줄이 선명하게 나타나더니 팥알 크기로 솟았다.
원인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다가 며칠 지나면 낫겠지 하여도 그대로 솟아 있었고 손으로 만지니 아파 병을 키우기 전에 치료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병원을 찾았다.

정형외과에 가서 X-RAY를 찍었더니 손목 근육 안에 염증이 생겨 깁스를 하였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깁스를 하고 나니 모든 생활이 부 자연스러워졌다.
자전거를 타고 병원을 찾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는 딸의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부엌일도 하지 말고 무조건 왼 손목을 쉬게 해야 한다고 하였지만 그게 쉬운가?
딸 아라는 이번 주는 자기가 집안일을 도맡아 하겠다고 하였지만 부담스러웠다.
다행히 반 깁스를 하여 살짝 풀어 놓고 급하게 일은 처리하였지만 정말 불편했다.
손목 하나 불편한 것이 이렇게 답답할 줄이야 미처 깨닫지 못하였다.

잠시 나에게 장애인이 얼마나 불편을 감내하면서 살아야 하는가를 체험하게 해 주는 귀한 체험의 시간이라고 생각하면서 좀 더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손목에 깁스를 하고 나니 밖으로 나가기도 쉽지 않아 자연히 집에서 머물게 되었다.
다행히 왼손이니 그림을 그릴 수 있었으나 역시 한 손으로는 모든 것이 불편하였다.
어제 오후에 양귀비꽃 그림을 그리다 잎을 그리려니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

무더기로 피어나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꽃잎과 헝클어진 푸른 잎을 그리고 싶었지만 마음은 훤하지만 붓으로는 표현이 되지 않아 덮어 놓고 양귀비 꽃밭으로 나갔다.

햇살이 반사되어 하얗게 보이는 붉은 꽃잎과 강열한 생명력의 나타내는 싱싱한 푸른 잎을 그리고 싶은데 캔버스 앞에 앉으면 왜 그리 망막해지는 걸까?

마음가는대로 붓질을 하여 보았지만 색상도 표현도 모두 어설프기만 하였다.
위대한 화가들도 실패를 거듭 한 후 마음에 드는 작품을 하나 그릴 수 있을 텐데 제대로 그려 보지도 않고 좋은 작품을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이리라.

스스로 마음을 다독이며 양귀비 꽃밭을 지나 한강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즐겨 걷는 산책길에 우묵하게 자라난 토끼풀 사이로 하얀 토끼풀 꽃이 한창이었다.
동그랗게 소담스레 피어 난 모습을 바라보니 어렴풋이 어린 시절 고향이 떠올랐다.
소를 몰고 풀을 먹이러 가는 오빠를 따라 둑길을 따라 걸으면 풀들이 발목을 감았다.
이맘때 논에는 물이 그득히 담겨 있었고 그 물속에는 하늘과 구름이 잠겨 있었다.
쟁기질을 하는 논둑에 자운영 꽃이 피어 꽃 이름처럼 보랏빛 구름밭을 이루고 있었다.
강 위 둑방에서 소몰이 아이들과 떠들고 노느랴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던 추억들.
하얀 토끼풀꽃 한아름 치마에 담아가 오빠에게 화관을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친구들과 놀기 바빴던 오빠는 토끼풀 시계를 만들어 내 왼쪽 손목에 매달아 주며 다음에 큼직하고 예쁜 화관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였으나 그 약속을 지켜지지 않았다.

깁스를 한 내 왼 팔목을 바라보니 까마득히 잊었던 그 유년의 약속이 떠오른다.
다시 그 유년의 강둑으로 되돌아가 오빠와 하얀 토끼풀 꽃반지와 화관을 만들고 싶다.

<정순이 프로필>
·광진문인협회 등단(2013)
·광진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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