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 노학순
소리꾼 노학순
  • 원동업
  • 승인 2020.12.24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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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광장에 우뚝 선 소리꾼 이창배를 아시나요?
100년 전 뚝섬패 왕십리패 노래 지금껏 살아남은 이유
이창배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노학순 명창. 소리꾼 노학순은 왕십리아리랑 이혜솔, 판소리 강승의 등 다른 소리꾼들과 함께 성동문화원에서 우리소리를 보존하고 전승, 교육시키는 일을 맡고 있다. 

왕십리 광장에는 세 동상이 서 있다. 김소월과 소녀상 그리고 벽파 이창배다. 김소월은 시 왕십리를 씀으로서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평화의 소녀상은 오랫 동안 감추어진 비극이므로, 그렇게 환하고 사람 많은 곳에 서는 게 마땅하다. 소리꾼 이창배의 동상이 거기 서있음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왕십리 땅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이창배는 2020년의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뚝섬패 왕십리패 명맥 이은 이창배

이창배는 소리꾼이었다. 요즘 말로 '가수'라 할 만한데, 우리에게 '소리꾼'의 그 '소리'는 단순히 노래만을 이르지는 않는다. 그 소리는 아이 우는 소리로부터 새 우는 소리, 물 긷고 차가 부릉부릉 하고, 사람을 부르는, 그 모든 소리다. 그의 삶을 먼저 살펴보자.

이창배는 104년 전인 1916년 9월 26일 옥수동에서 태어났다. 당시 성동은 경기도 고양군에 속해 있었으니, 그는 고양군 한지면 두모리 혹은 경성부 옥수정 출신이다. 한양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전공을 살려 체신국서 측량기사로도 일하며 전국을 다니기도 한다. 1966년 종로 봉익동[현재 종로엔 국악거리가 형성돼 있다]으로 이사하기까지 50여 년을 성동서 살았다. 그의 고모부는 피리와 단소를 일찍이 이창배에게 전수함으로서 그가 소리꾼이 될 바탕을 깐다. 그의 활동영역이 성동이었던 점은 그가 소리꾼이 되는 데 결정적이었다. 당시 뚝섬 소리꾼 이태문이 경서도 선소리를 왕십리 소리꾼 명길, 명산 형제에게 전하는데, 그 왕십리패 모갑이(집단의 우두머리, 꼭두쇠) 명길과 이창배가 운명적 만남을 갖는다.  

이창배는 몇 가지 점에서 이전의 소리꾼들과는 전혀 다른 이였다. 하나는 그가 세운 청구고전성악학교. 이전까지 소리꾼들은 체계적인 학교 시스템에서 길러지는 이들이 아니었다. 소리꾼들이 함께 모이거나 의논할 곳도 없었다. 이전에 이름 높은 소리꾼은 양반네 집에서 부르면 가고, 부르라면 부르던 처지였다. 이창배의 학교는 소리꾼들의 구심이 되었다. 둘째로 그는 몇 권의 책을 편집 출판해 낸다. 왕십리 동상에서 그의 오른손이 얹고 있는 책들은 <가요집성>, <한국가창대계>, <국악대전집>, <민요삼천리>다. 구전심수(口傳心授), '입으로 전하고 마음으로 받는다'는 우리 소리는 차근차근 갈무리돼 글로 책으로 남는다. 

이전까지 유성기와 릴테잎 그리고 LP음반으로 흩어져있던 이창배의 '소리'는 2000년대 초, 신나라 레코드를 통해 CD로 제작된 바 있다. 그 제작기에서 전하고 있는 이창배 선생의 모습 역시 교육자요 편집인이다. 그는 소리를 가르칠 때, 꼭 그 가사를 칠판에 적고 자세한 설명을 하곤 했다. 한자의 경우에는 그 역사와 고사를 꼼꼼히 풀었는데, 그 이유는 '그 뜻을 안 뒤에라야 진정한 소리가 나온다'는 그의 철학 때문이었다. 그가 늘 들고다니던 검정 가죽 가방은 책이 가득 차서 배가 불룩하였다. [-김금숙  구고전성악학원 1기졸업생의 증언] 자칫 사라져버릴 수도 있던 우리 땅의 가사, 가곡, 시조, 민요, 경서도창, 타령 등의 사설이 고스란히 살아남을 수 있던 건 8할이 그의 공이었다. 

이창배의 자산 복원하려 애쓴 사람들

문화원? 내가 아는 문화원은 부산 미문화원이 있었다. 80년 광주민주화운동의 희생에 부채감을 갖고 있던 젊은이들이 방화를 했던 그 사건. 그리고 유학을 가거나 이민을 가기 전에, 혹은 그 나라 문화와 영화를 접하려고 했던 많은 이들이 그 나라 문화원을 찾았노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성동에도 문화원이 있었다. 이창배의 실마리가 그곳엔 있지 않을까? 과연 그랬다. 광장에 이창배의 동상이 서게 된 데는 성동문화원의 공이 컸다. 성동문화원을 찾아갔다. 이사로 활동하고 있는 노학순 명창과의 대화. 

“어느날 성동문화원 김진환 팀장이 제게 왔어요. 제겐 고맙고 미안한 사람이죠. 이창배 선생님을 아시느냐는 거예요? 알다마다요. 소리꾼들의 아버지 같은 분인 걸. 성동인으로 추모를 하고 싶다는 거였어요. 서류를 전부 작성해서 여기저기 다니더니 지원금도 받아왔어요. 그걸 가지고 어딜 가야되느냐고. 해서 처음 최창남 대부를 찾아갔죠. 다음엔 황영주 명창. 근데 도무지 안 풀리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서한범 교수를 찾아갔어요. 쇠납 호적을 부는 이예요. 그분이 세미나를 크게 열고, 공연도 진행했죠. 사람들 모아 선생님 동상도 광장에 세우고…….”

2012년 6월 14일. 소월아트홀에서는 '벽파 이창배, 그의 생애와 예술세계'를 다루는 전국 국악학 학술대회가 성대하게 열린다. 벽파에 대한 쪽 기억들도 한데 모여 책의 형태를 이룬 다. 그 자료집을 얻은 것도 성동문화원에서였다. 이창배 선생의 생애와 작품에 대한 소개가 빼곡했다. 노학순 선생이 말을 잇는다.  

“제가 이창배 선생님께 직접 배운 건 아니었어요. 다만 종로에서 자주 뵈었어요. 인사를 드리면 늘 인자하게 받아주시곤 했어요. 어, 그래 어느 선생께 공부하나? 네, 이은주 선생님께 배웁니다. 오 그래 좋은 선생에게 배우는구먼. 열심히 배우소! 그러시곤 했죠.”

이창배 음반

노학순 혹은 이희문, 전통이 현대에서 다시 사는 법

소리꾼 노학순은 그러나 이창배 선생의 무릎제자 백영춘 선생과 함께 공연했다. 백영춘 선생도 이창배 선생을 꼭 빼어닮은 구석이 있었다. 우리 타령 중 '장대장타령'을 백영춘은 연구하고 갈고 닦았다. 극본으로 정리하고, 사람을 모아 연습했다. 그 장대장타령을 국립극장 대극장서 3천 명을 가득 채우고 공연했다. 장대장타령은 서울시 무형문화재 38호가 됐다. 

 노학순은 은사로 모셨던 이은주 명창의 일생을 모티브로 한 <은주이야기>를 국악뮤지컬로 올리기도 했다. 민요에는 부족한 서사(이야기)를 입히려는 시도였다. 그 은주 선생님은 제자 학순이 장대장타령서 '떡장사' 같은 역할을 하는 걸 은근히 말리셨다. 하지만 학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어떻게 전통이란 것이 예쁘게 한복 입고, 이전에 불렀던 노래만 다시 부르는 것일 수 있겠어요. 이희문 같은 젊은이도 있잖아요. 머리를 깨버린 거예요.”

이희문? 그는 파격적인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경기민요 이수자 고주랑 명창. 스물여섯에야 '소리를 시작'한 아들의 행동을 보고 “쟤가 미쳤나?”했다. 이희문은 소리판에서는 귀한, 남자였다. 그런데 망사 스타킹 입고, 높은 굽 하이힐 신고, 얼굴을 새하얗게 혹은 은빛칠을 하고 무대에 나섰다. 프렐류드같은 재즈 뮤지션들과 협업하고, 록의 비트와 함께 노래 불렀다. 그는 춤도 추었다. 어쩌면 덩실덩실 추는 춤 같아 낯이 설지 않은데, 그건 전통의 무용이라기보다는 클럽에서 혹은 디스코장에서 볼 것같은 날것의 것, 우리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몸짓이었다. 이희문은 모든 것들을 뮤직비디오로 만들어 유튜브에서 공유했다. 그 이희문의 맹꽁이타령을 유튜브를 통해 들었다. 이창배가 정리해 갈무리했던 그 <맹꽁이타령>의 사설이 한 글자 틀림없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원동업=성수동쓰다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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