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과 빈속
빈손과 빈속
  • 성광일보
  • 승인 2021.02.1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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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란교/논설위원
송란교
송란교

주말이면 습관적으로 아파트 근처에 있는 하천을 찾는다. 흐르는 물살이 느릿느릿 빠르지 않아 그 속도에 맞추어 걸음을 옮기곤 한다. 간혹 잉어와 함께 걷기도 한다. 조금 포근해진 날씨 때문인지 평소보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달리기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산보도 하고 있어 마음이 편치 않아 눈이 바쁘게 쉬어갈 자리를 찾았다.

사람들의 왕래가 조금 덜한 곳에 황소 엉덩이만한 바위가 있어 쉬어가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그 자리를 나에게 양보해준 다른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참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밀린 숙제 하듯 오래 묵은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비워나갔다. 그리고 보물찾기 하듯 한 구절 한마디를 새롭게 채우기를 하고 있었다. 잠간 지나가는 구름을 쳐다보려 머리를 들어보니 구름은 간 데 없고 동서남북 사방에서 비둘기 네 마리리가 배고픈 눈을 깜박거리며 다가올 듯 말 듯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줄 것 없는 빈손, 너는 채울 것 없는 빈속, 나는 주지 못해 속상한 빈털터리, 너는 받지 못해 배고픈 떨거지, 떠나지 못하는 나를 지키는가, 빵부스러기 흘러내리기를 기다리는가, 차마 돌아갈 수 없는 나, 차마 뒤돌아볼 수 없는 너”라는 시구를 네모난 바위에 새기었다.

비둘기들이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데 저 네 마리만 왜 나에게 다가오는 것일까? 그 무리 중에서 제일 똑똑한 녀석들인가? 영리하게도 사방을 둘러싸고 원을 그리듯 엉금엄금 살금살금 내 곁으로 다가온다. 나는 옴짝달싹 못하고 전기에 감전된 듯 미라같이 굳은 몸으로 그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덟 개의 눈망울이 쉴 새 없이 나름 감시하며 포위망을 조금씩 좁혀오고 있었다. 초병의 초조한 눈을 감춘 채 둥근 센서를 지닌 로봇처럼 나의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축하할 일도 많은데 한 데 모여서 축하할 수도 없고, 기뻐할 일도 많은데 함께 기뻐할 수도 없고, 슬퍼할 일도 많은데 마음 보태어 슬픔을 쪼갤 수도 없고, 위로할 일도 많은데 가까이 다가가서 위로할 수도 없는데, 저 녀석들은 거리낌 없이 내게로 다가온다. 너와 나 사이에도 마음의 거리두기가 필요한 것 아닌가?

서로 빈손이 되고 보니 미안하고, 서로 빈속이 되고 보니 허전하다. 엄마 품 떠난 지 오랜 세월이라 따뜻한 정에 굶주리고, 일회용 식품에 갇혀 살다보니 구수한 된장국에 허기지니 먹는다고 하지만 배고픔만 쌓이고 민망함만 늘어난다. 그 녀석들의 두 눈에 서린 배고픔을 마주하다보니 그 자리에 계속 앉아 있기가 참으로 옹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키고 있으면 무언가 좋은 것이 나오리라, 무언가 먹을거리가 쏟아지리라 굳게 믿으면서 여덟 개의 눈이 사방을 가로 막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내 곁을 지키는 호위무사가 되었다. 차마 두 눈으로 볼 수 없어 한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녀석들을 바라본다. 날카로운 칼 날 위에 서서 서로 눈치 싸움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머리카락이 삐죽삐죽 거린다. 예리한 센서가 작동하면서 ‘움직이면 쏜다, 너는 포위됐다’라고 외치는 소리가 귀전을 때리는 듯하다

거 참, 배불뚝이 상사와 마주한 채 색색거리며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처럼 숨 쉬는 것조차 어색하고 불편하다. 배고파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릴 길 없는 엄마의 애절함이 바람에 날린다. 어린 아이에게 쌩쌩 불어대는 칼바람에 빨갛게 물든 귓불을 감싸주는 귀마개 하나 걸쳐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찢어지는 속상함도 강물 따라 흐른다. 낚시코에 걸린 미끼의 꼬리 한 점 떼어먹어 보려 하니 그 새를 못 참고 잡아채는 낚시꾼을 바라보며 물고기가 입맛을 다신다. 먹지 못하게 해서 얄밉다는 생각과 낚시코에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구나라는 생각이 교차하지만, 그래도 아쉽다고 한 숨 쉬는 소리가 물거품으로 일어난다. 어묵 튀기는 냄새에 빈속의 배고픔이 꼬르륵 꾸르륵 천둥소리 요란하지만 그 유혹을 꾹꾹 참아내는 샐러리맨들의 퇴근길이 생각난다.

호주머니 속을 은근슬쩍 더듬는 손놀림의 허전함도, 그냥 빈손이어서 허기진 쓸쓸함도, 갑자기 윙윙거리며 날아오는 비행기가 고맙다. 빙그레 웃으며 조용히 일어서는 나에게 서운하다는 듯 미안하다는 듯 비둘기들이 고개를 연신 끄덕거린다. 빈손이어서 미안하다고, 빈속이어서 배고프다고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들은 눈짓으로 헤어짐을 용서했다. ‘그래도 괜찮아’ 하고 서로를 위로해주었다. 내쫓지 않고 그냥 편하게 바라봐 주고 네 곁에 있게 해줘서 고마워 라고 하면서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있는 비둘기가 고맙다. 비둘기조차도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감사할 거리는 거창한 것도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내 주변에 널려 있다. 다만 내 마음이 감사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오늘도 그 녀석들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 반 기다림 반으로 그 길을 걸어본다. 호주머니 속에 빵 한 조각 넣고서 그 강물을 따라 소리 없이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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