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겨울나무
<수필> 겨울나무
  • 성광일보
  • 승인 2021.03.02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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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용순 / 수필가
서용순

바람이 차고 시리다. 병원에 들어서니 특유의 냄새가 와락, 후각을 자극한다. 외과 진료실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기며 손에 쥐고 있던 따뜻한 캔커피를 볼에 갖다 댄다. 따스하다. 하지만 두려움은 진정되지 않는다. 한 달 전 의사가 불쑥 던진 말이 떠올랐다.
“재검사를 받아야겠습니다.”

그날 이후 온갖 불길한 예감으로 머릿속이 헝클어진 실타래 같았다. 도대체 내 몸속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재검사 결과가 좋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했다.
서른 나이에 힘겹게 투병을 하고 있는 친구 동생이 생각났다. 삭정이같이 마른 손으로 딱딱하게 굳어 버린 가슴을 쓸어내리던 모습.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 앞에서 서서히 무릎을 꺾어야 하는 어린 두 아이의 어미. 모든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라는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내가 잘못 보낸 시간은 언제였을까. 마음을 가다듬고 깊숙이 똬리를 틀고 앉은 먼 기억을 떠올렸다.

이십대 초반, 여기서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 땅에 민주화의 열망이 하늘을 찌를 때 우리는 거리에서 최루탄을 마시고 싸구려 실비집에 앉아 깡소주를 마셔댔다. 그때 알코올에 단련되지 않은 나는 피를 토하기까지 했다. 겁도 없고 무모하기도 한 청춘이었다. 그런데 지금 내 발목을 잡으려고 하는 건 위장이 아니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고 일 년이나 모유 수유를 했으니 절대 안정권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복병이 나타난 것이다. 출산과 수유 경험이 없는 여성에게 잘 나타난다는 이상 징후가 왜 나를 위협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 속을 끓이는 성격 때문인가. 아니면 먹는 것을 대수롭잖게 여긴 결과일까. 신진대사가 점점 떨어지는 나이 탓인가. 그렇다 해도 '시간의 보복'을 당할 만큼 잘못 산 것 같지는 않은데, 자꾸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문제가 발견된 쪽 가슴 사진을 다시 찍기 시작했다. 맘모 촬영기에 맨살이 닿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처음보다 훨씬 아프고 시간도 더 걸리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비명소리가 새어 나왔다. 촬영기사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그의 표정은 창문을 흔들어 대는 바람처럼 차가워 보였다. 촬영이 끝나자 그가 표정을 풀면서 한 마디 툭 던졌다.
“미리 걱정할 건 없습니다.”

위로의 말이었을까? 하지만 불안한 마음은 가라앉지 않았다.
나는 차가운 철판에 눌려 찌부러졌던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초음파 검사실로 옮겼다. 침대 맞은편 벽에는 먼젓번 필름과 조금 전에 재촬영한 것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양쪽이 똑같아야 한다는데, 그렇지 않았다. 한쪽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마치 계란 흰자위를 풀어 놓은 것 같았다.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내 가슴 위에 젤리를 바르더니 초음파 기계를 갖다 댔다. 겨드랑이 림프선까지 꼼꼼하게 점검했다.

그런데 문제의 부분에서 한참 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어지는 묵직한 침묵.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때 속에서 '쿵'하는 소리와 함께 심장박동 소리가 빨라졌다.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올라와 입술을 꼭 깨물었다. 마침내 의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은 확답을 할 수 없습니다. 좀 더 두고 보지요.”

순간 “아!” 하고 한숨이 나왔다.  눈앞의 지뢰를 용케 건너뛰었을 때의 안도감이 이런 것일까. '좀 더 두고 보자'는 말이 걸리긴 해도 유예기간을 확보한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었다. 아들아이 얼굴이 떠올랐다.
“그것 봐, 엄마는 백 살까지 문제없다니까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환하게 웃을 아이가 생각나 코허리에 매운바람이 맺혔다.
버스를 타지 않았다. 두 정거장 되는 길을 걷고 있었다. 어린이대공원의 나무들이 온몸으로 찬바람을 맞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나무와 사람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시련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서서 버텨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인간은 수직일 때 아름답다”고 한 조각가 자코메티의 말은 진실이었다. 위인도 성인도 누워 있는 한 그는 산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수평의 인간'에겐 더 이상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살려면 서서 버텨야 한다.

지금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리 고달프고 아파도 꿋꿋이 서 있어야 하는 어미의 운명. 그 견고한 모성일 것이다.
나는 가혹한 겨울을 견디고 있는 저 나무들의 몸통 속에 예비되어 있는 충만한 봄기운을 느끼고 있다. 인고의 시간을 통해 무성한 잎으로 그늘을 만들고 탐스러운 열매를 맺을 나무. 그 나무들에게서 시련을 견뎌 내는 지혜를 배우고 있는 중이다.

<서용순 프로필>
·수필가
·광진문인협회 고문
·이지출판사 대표
·에세이문학작가회 부회장
·(사)해외동포책보내기운동협의회 이사
·저서 《갈망의 노래》《Colors of Arirang》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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