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냉이국 이야기
<수 필> 냉이국 이야기
  • 성광일보
  • 승인 2021.03.12 1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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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용/수필가

동네 슈퍼에서 햇냉이를 만났다. 순간 내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냉잇국 냄새가 돌아오고 있었다. 냉잇국 생각만으로도 기운이 솟았다. 이른 봄 양지바른 언덕이나 김장 배추 뽑은 묵은 밭에 냉이가 예쁜 싹을 보였다. 손을 호호 불며 서로 누가 많이 캤나 바구니를 넘겨다보며 경쟁했던 기억도 되살아났다. 그런 냉이를 마트에서 쉽게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냉이는 잔털도 뜯어내고 다듬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 옛날, 어머니는 냉잇국이나 무침을 해주실 때 꼭 한마디 하셨다. 냉이는 엄마가 해주는 것만 먹으라고. 이렇게 손질이 어려우니 하신 말씀이었으리라. 
국물에 쌀뜨물을 붓고 된장을 풀고, 손질한 냉이를 듬뿍 넣고 달래도 넉넉히 넣었다. 한소끔 끓을 때마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드디어 구수한 향이 넘치는 냉잇국이 완성되었다. 비타민도 한 주먹 들었을 냉이국. 나 혼자 마주한 점심 식탁이었다. 구수한 맛에 같이 먹고 싶은 얼굴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나 혼자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었다.

우리 칠 남매가 자랄 때는 두레상에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퇴근하는 아버지는 “아니, 이게 다 우리 애들이요?”하며 대견해하셨다. 
우리는 누가 구령이나 한 것처럼 일제히 일어나 아버지를 맞았다. 자상하시면서도 카리스마 넘치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왜 이렇게 보고 싶은지 모르겠다. 냉잇국 탓일 것이다.

아버지의 저녁상이 차려지는 동안 우리는 서로 하루 동안 벌어졌던 이야기를 앞다투며 늘어놓았다. 부모님이 해주시는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쏙쏙 박혔다. 
지금 생각하니 우리 집안의 화목했던 분위기는 부모님의 유별난 금슬 덕이었지 싶다. 아버지는 아침 뜰을 쓸며 칠 남매의 옷이며 신발, 학용품까지 수첩에 일일이 적어놓았다가 챙겨주시곤 했다. 
새 옷을 사 오면 단추도 다시 달아주셨다. 사업을 하면서도 가정사에 관심을 많이 가지셨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이런 자상함이 없었다면, 어머니가 우리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 안팎 머슴까지 거느리신 큰 살림을 하지 못하셨으리라.

그때 우리 집에는 제사도 많았다. 제사가 끝나면 심야에 이웃들과 제삿밥을 돌려 나누어 먹곤 했다. 힘든 시절이었지만 서로의 정이 넘쳤다. 그래서일까. 요즘도 세상이 팍팍해질수록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추억을 불러내곤 했다. 
우리 집에서는 요즘 시부모님 기일도 몇 해 전부터 하루에 다 모시고 있어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모처럼, 냉잇국으로 향수를 불러일으킨 겨울 어느 날 하루였다. 
그날 저녁 적막하던 우리 부부의 식탁에도 미리 온 봄빛이 환하게 꽃망울을 터뜨렸다. 냉잇국 한 그릇에 봄기운 같은 신선함이 샘 솟았다. 이 힘으로 겨울을 거뜬히 지낼 것 같았다. 냉잇국 향이 짙음은 고향의 향수를 함께 담았기 때문이리라.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맘대로 해먹을 수 있는 자유, 이보다 더한 행복은 없으리라.

<최학용>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성동지부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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