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재홍 (현 GS성수뚝섬점 운영)
고재홍 (현 GS성수뚝섬점 운영)
  • 원동업 기자
  • 승인 2021.03.12 14: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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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우스포 국가대표 권투선수이자 성수동 스뎅 공장 노동자
“얕봤던 선수에 쓰러졌다. 예상치 못한 데서 다시 일어났다!”
그가 운영하는 GS25 성수뚝섬점 편의점에서 자세를 취했다. 사우스포는 왼손잡이 복서.

그를 만난 건 3월 6일 토요일 오전 10시쯤. 그가 운영하는 GS성수뚝섬점 업무 교대를 하는 시각이다. 경칩이 하루 지났고, 길가엔 벌써 흰 벚꽃과 노란 산수유가 보였지만, 바람은 여전히 찼다. 그럼에도 그는 편의점 옆 노천서 인터뷰 진행을 청했다. 카페니 커피숍이니 하는 실내보다 이웃들 오가며 한소리씩 섞는 걸, 한강 수문서 불어오는 강바람을, 고재홍 그는 더 편해하는 듯했다. 기자는 몸을 떨면서, 그는 코를 닦아가며 이야기를 나눴다. 묻고 답한 내용을 자서전 형식으로 기자가 다시 정리했다.

나는 광주에서 났다. 1957년생. 서울 여기 성수동 뚝섬에 온 건 1977년. 광주일고 1학년때 학교를 중퇴했고, (방황을 하다) 여기 성수동에 온 이유는 일하면서 권투를 계속하기 위해서였다. 헝그리 복서라고, 당시 권투를 하는 애들은 모두 가난했다. 내가 권투를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세계챔피언을 먹으면 돈방석에 앉는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나는 사우스포! 세계챔피언이 되면 돈방석에 앉는다고?

내가 소속돼 운동을 한 곳은 전농동 극동체육관이었다. 한때 세계챔피언을 일곱 명이나 데리고 있는 한국 권투의 본산 같은 곳이었다.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나는 체격이 작았고 체중도 얼마 나가지 않았다. 라이트플라이급. 

어릴 적에 나는 축구를 했다. 운동신경이 좋았고, 깡도 좋았다. 내게도 트레이너가 붙어 다녔다. 키가 작은 나도 어릴 적에는 그다지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점차 친구들은 컸고, 나는 자라지 않았다. 운동을 지속하기 위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있는 건, 나와 비슷한 선수들과 붙는 수밖에 없었다. 권투는 체급경기였다.

내가 속한 체급은 라이트플라이급. 48.980킬로그램 이하의 선수로만 구성된다. 그 위로 3킬로그램 위가 플라이급, 다시 4킬로를 더 붙여 밴텀급, 페더급과 라이트급, 라이트웰터급과 웰터급, 라이트 미들급과 미들급, 라이트헤비급 헤비급 수퍼헤비급 순으로 체중이 올라간다.

권투는 상대와의 싸움보다 먼저 체중과 싸워야한다. 체중이 한계를 넘으면 탈락이고, 그렇다고 상대보다 가벼우면 불리하다. 힘은 체중(그리고 스피드)에서 나오니까. 애 낳는 게 힘들다고 말하지만, 체중을 줄이는 일도 그에 못지 않을 거다. 한증막에 들어가, 땀복을 두세 벌 쯤 입고, 몸 안의 수분을 증발시키는 게 우리들이 주로 하는 방법이었다. 몸을 북어로 만드는 게 우리의 목표였다. 시합 전까지 7~8킬로그램을 빼기도 했다. 계체량 통과를 위한 검사는 시합 당일 여섯 시. 한국권투위원회 사람들이 나와 측정한다. 당일 두 시쯤 시합을 했다. 얼마나 회복을 하느냐가 늘 관건이다. 회복을 한다고 고기를 먹으면 체한다. 경기 전엔 죽을 먹거나, 사과를 갈아마셨다.

1979년, 광주전남 대표가 돼야했지만, 나는 서울에 적을 두고 있었다. 서울대표로 나섰다. 처녀 출전한 전국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다.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나가 통과했다.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였다. 1980년 열리는 올림픽이 내꿈이었다. 하지만 대표 선발전은 또 있었다. 대구서 온 선수와 붙기로 돼 있었다. 난 그를 알았다. 쉬운 선수였다. 내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링에 올라 만난 그는 전혀 달랐다. 스트레이트가 강하고 눈이 빠른 내 강점이 안 통했다. 그는 엄청난 준비를 한 것 같았다. 판정에서 심판의 손을 따라 그의 손이 공중에 치켜졌다.

그의 왼손 약지는 움푹 패였다. 사우스포 권투선수로서의 훈장이다.

한바탕 꿈같은 국가대표. 얕봤던 선수에 졌다

라커룸서 샤워를 하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고, 체육관 식구들을 따라 고기를 먹으러 가는 건 승리자의 몫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우리나라는 불참했다. 그리고 운명은 나를 낚아채 갔다. 1980년 8월 4일, 사회악일소특별조치 및 계엄포고령 제19호 계획이 발표됐다.

체제에 반대하는 대학생들, 사회에 불만을 말했던 평범한 이웃들, 주거지가 일정치 않았던 이들이 무수히 나와 같은 신세가 되어 그곳에 끌려갔다. A급 정치범, B급 폭력, C급 훈방. 그들 마음대로 사람들을 나누고 골랐다. 고교 중퇴후 '방황'하던 시기 나는 주먹을 휘둘렀다. 그 일이 나를 옭아맸다. 그들은 나를 'B급'에 분류했다. '정의사회구현'을 위해 그들은 조직적 폭력과 인권 유린행위를 했다. 하지만 그곳에도 사람은 살고 있었다. 당시 중대장은 선수증을 갖고 있던 나를 인정해주었다. “나가 다시 링에 서라!” 그의 배려로 나는 1년6개월의 '복무'를 마치고 다시 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83년 8월 15일. 정동에 있던 문화체육관에서 나는 재기전을 치룬다. 프로 데뷔 첫 대전. 혈투였다. 교육대서 구타로 부상당한 왼쪽 팔이 문제였다. 사우스포! 왼손잡이 권투선수인 내게는 더구나 치명적이었다. 지금도 내 왼주먹 약지는 움푹 파여있다. 콘크리트처럼 붕대를 감고 글러브를 끼지만, 사람의 머리뼈는 내 주먹보다 더 단단했다. 나는 이겼다. 한 번 더 싸웠다. 그때도 이겼다. 그러나 결국 링을 떠나야했다. 체중이 불어나는 것도, 어깨 부상도, 나이도 내 편이 아니었다. 이제는 은퇴를 한 것이다.

당시의 사진들? 트로피? 없다. 싹 다 내 눈앞에서 지우고 치웠다. 그걸 보면 자꾸 옛생각이 났다. 후학을 가르칠 생각? 그게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다. 공장에선 내가 원하는 모양대로 제품을 생산했다. 직원들도 다그치거나 가르치면 됐다. 선수들은 달랐다. 가르침을 고스란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능이 있는 친구들은 더 그랬다. 나도 그랬으니까. 코치의 눈을 피해 나는 슬쩍 술도, 담배도 했다. 고된 노동과 더 고된 선수생활에서 그건 작은 위로였으니까.

새벽에 편의점 문 연다. 내 꿈은 아이들에게로 그 제자들에게로 다시

나는 스테인레스 업계로 다시 돌아갔다. 이젠 내 사업을 하기로 했다. 1984년, 승진스테인레스가 업체명이었다. 이기고 나아가는 길! 스테인레스 원판을 주문해 헤리시보리(성형)하고, 빠우(버핑, 광내기)해 납품했다. 수원지 가까운 담벼락 인근 공장서 운영하던 업체는 서울숲이 조성되면서 남양주 원암리로, 또 어디로 옮겨가다 결국 문을 닫았다. 지금은 오랜 동안의 내 삶의 터 성수동서 편의점을 운영한다. 

아침에 문을 열면 가난한 내 이웃들이 와서 막걸리를 고른다. 식당에서 3천원, 4천원 하는 막걸리조차 고르는 게 부담스런 이들이다. 나도 밥을 먹으니까 그들에게 반찬을, 밥을 나눠준다. 그 이웃들과 자연스레 식사도 하게 된다. 겨울엔 천막을 치고, 여름엔 그런 것도 없이 수시다. 한갓진 이 편의점 옆 공간은 동네 느티나무 아래 정자같다. 
편의점을 예전엔 스물네 시간 운영했다. 요즘은 열두시면 문을 닫는다. 여섯시부터 영업하지만, 나는 다섯 시면 문을 연다. 일찍 알바를 오게 할 수 없으니, 문 여는 일은 내가 맡는다. 토요일엔 10시가, 일요일엔 아침 여덟시가 교대시간이다. 내 아들들의 제자들이 주로 아르바이트를 한다. 아들 둘은 모두 체육계에 있다. 큰애는 해병대 장교였다. 지금은 체대입시를 하는 학생들을 가르친다. 작은애는 나이키에서 주최하는 더찬스 기회를 잡아 영국에도 단기 유학을 다녀왔다. 지금은 성동FC를 맡고 있다. 고용준, 고용필 두 아이는 내 자부심이다. 모든 아비들에게 아이들이 그렇듯.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다. 내가 못 이룬 꿈을 대신 이루자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재능을 보이고, 자신들이 원하니, 힘닿는 대로 밀어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내 꿈은 내 아이들이 이어서 그리고, 그 제자들에게 이어진다. 스텝은 계속 앞으로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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