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반세기 세월 속에 성동구 모습
<수필> 반세기 세월 속에 성동구 모습
  • 성광일보
  • 승인 2021.03.25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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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석 / 수필가, 성동문인협회 회장
이규석/성동문인협회장
이규석/성동문인협회장

7층 내빈 접견실에 앉아서 눈을 돌리니 창 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보인다. 저 아파트를 포함해서 왼쪽은 미군 유류 창고와 관리부대가 있었고 오른쪽은 이 자리에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은 4~5층 상가주택들과 왕십리역으로 드나드는 출입구가 있는데 그때는 규모가 매우 큰 석유 비축 탱크가 여러 개 있었다. 이 근처는 동대문에서 뚝섬까지 가는 기동차 선로를 따라 난 샛길의 양쪽으로 미국 군부대 철조망이 높게 둘러있었고 이따금 경비병이 보여서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 아니면 이 길은 잘 지나다니지 않아 한산했다. 

1963년 봄, 서울에 처음 입성하여 오늘날 한양대 의과대학이 자리한 사근동 어느 단층집에 사촌과 잠시 함께 살다가 마장동 대성연탄 공장으로 석탄을 나르는 철로가 갈라지는 곳으로 이사했기 때문에 이 샛길을 꽤 지나다녔다. 

어스름한 저녁에 군부대 보안등이 켜지고, 당시 보르바꾸라 부르는 두꺼운 종이 상자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몸을 가릴 정도만큼 만든 보금자리 몇 채(?)가 이 길가에 있었다. 그 속으로 신사복을 입은 사람이나 젊은 여자들도 들어가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몸부터 먼저 들어가고 구두는 나중에 들여가는 초미니 공간이었다. 
1960년대 초에는 고졸, 대졸의 고 학력자들에게는 일자리라는 것이 공무원, 교원, 작은 사업체의 노무 및 사무직 밖에는 없어서 가뭄에 콩 나듯 드문 대학 졸업생들 조차 취업할 곳이 없어 소위 고등실업자라 불리는 사람이 많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인공지능 시대로 전환하는 시기여서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코로나라는 역병까지 덮쳐 모든 것이 어려워져 취업 길이 막히고 하던 일도 정리하는 고난의 시대가 되었다. 

60년대는 직장이 없어서 취업할 곳이 없던 시절이고 지금은 경제 규모는 커져가도 자동화와 로봇 등 첨단 기구의 발달로 인적 자원의 수요가 줄어드는 데다 고도성장 시대가 끝나서 젊은이들이 취업 길이 줄어들어 어려움이 많게 되었다. 

일자리가 없는 점에서는 같지만 60년대는 다 같이 빈곤 속에서 조금이라도 좋아지려는 상황이고 지금은 상대적 빈곤감을 넘어 박탈감까지 갖는 점이 당시와는 크게 다르다. 

반면에 70년대 이후 양적 성장기에는 일자리가 늘어나고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것이 성장해 소위 살림살이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서민들의 배고픔은 많이 해소되었고 민주화도 고난 속에 서서히 이뤄져가서 지금은 초로에 접어든 이 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이 희망에 부풀 수가 있었다. 

기동차가 다니는 길옆 이 작은 길가에 종이 상자로 엮어 만든 집 아닌 집에 기거하는 사람이 요즘의 홈리스와 다른 점은 시골에서 상경하여 어렵게 직장을 구해서 돈을 버니까 허리띠를 졸라매고 얼마간을 버티면 사글세로 방을 얻을 수 있었고, 몇 년이 지나면 전셋집을 얻어 결혼도 했고 장차 더 큰 꿈을 실현하겠다는 투지로 무장된 젊은 사람이란 점이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이때 고2 학생으로 농업고를 탈출하여 서울로 무작정 올라온 내가 몇 개월간 기거한 곳이 사근동이었고 그곳에서 이동한 곳이 왕십리역 바로 옆 마장동의 탄가루 휘날리는 철길 가였다. 

지금 내가 앉은 성동구청 접견실은 기동차가 다니던 선로, 군부대 일부, 왕십리역 소화물 야적장과 원목 하차장이 있었던 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왕십리 전차 종점에서 철길을 넘어 마장동으로 넘어가기 위해 비공식으로 묵인되어 횡단하던 곳이다. 

물론 횡단하기 위한 길이나 횡단하라는 표지도 없이 그냥 철로를 아슬아슬하게 넘어 다녔다. 때로는 야적장 부근에서 호루라기를 요란하게 불며 화물로부터 좀 더 떨어져서 가라는 근무자가 소리까지 질러서 팍팍하게 사는 서민들을 주눅 들게 하곤 했다. 

철로를 넘자마자 첫 번째 집이 내가 살던 곳이었는데 이 집은 중앙선 철길 가에서 10여 m 거리에 높이는 4m 정도 낮았고, 대성연탄 공장으로 가는 철길에서 2m 정도 거리에 높이는 약 2m 낮았다. 

중앙선은 디젤 기관차가 다녔지만 연탄 공장에는 증기기관차가 다녔는데 가끔 기관사가 식사 중인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장난삼아 기아 변속을 하면 소반과 그 위에 있는 그릇이 마구 흔들렸다. 여기 집에서 학교는 걸어서 다녔는데 비가 오면 일대가 석탄으로 범벅이 되어 걷기가 힘들었고 미군 부대 앞을 지나 골목길로 들어서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몹시 질퍽거리는 길을 지나야 했다. 

학교는 경계가 미나리꽝이었는데 낮에도 가끔 모기가 달려들었고 예산 관계인지 건물을 세운 후 창문도 없어서 바람이 불면 책과 공책이 바람에 날리곤 했다. 이때 한양대가 강당을 처음 지어, 강연 등 행사가 이 지역 고등학생들 상대로 여기에서 있었다. 건물이 너무 좋다고 하니까 10여 년 전에 을지로 6가에 학교가 있고 이곳 사근동에서도 강의가 있었는데 겨울 한강 바람에 임시 건물이 넘어가서 학생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별일도 아니지만 행사장에 나온 인근의 소위 이류학교 학생들조차 우리 학교 학생을 내려보고 말하는데 자존심이 상했지만 내가 좋아서 어머니를 떠나온 죄스러움에 열심히 공부해서 빨리 돈 벌어 효도하리라는 굳은 마음으로 곁눈 팔지는 않았다. 

그나마 월세가 싸서 살던 철로 변 집은 그해 8월 말 늦장마 때 물이 들어 혼비백산하였다. 가재도구라야 별로 없었어도 4m 언덕 철길에 모두 옮기고 밤새 추위로 떨었고 다음 날 빗물이 다 빠진 후에 청소를 했으나 방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끊이지를 않았다.

이듬해 고3 때 할 수 없이 지금 왕십리역에서 한양대로 가는 곳에 지름 50여m, 지하 깊이는 모르겠고 지상 시설 높이 30여m 되는 여러 개의 석유 비축 탱크 사이에 있는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기차 소리가 안 들려 조용하고 좋았지만 혹시 사고가 나면 지상에서 영원으로 가는 지름길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는 가끔 기분을 울적하게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도 왕십리역 앞으로 전차나 버스를 타러 빨리 가려면 선로를 몇 개 넘어 가로질러 가야 하는 불안함이 있었는데 역으로 내려가는 언덕이 가팔라서 눈이 오면 쓸어내도 소용이 없고 한두 번은 넘어져야 했다. 

1955년 초등학교 3학년 겨울 방학 때 형 따라 서울에 처음 와서 며칠을 지냈는데 지나가는 기동차가 지붕에 닿을 것 같은 집이었고, 그 추운 겨울에도 연탄조차 때지 않아 정말 추웠다. 

사실 그 당시 장작으로 밥을 하는 정도였지 연탄이 일반화되지는 않았다. 내가 추워한다고 연탄을 사다 특별히 피웠는데 그 냄새 때문에 어지럽더니 소화가 되지 않아 토하기까지 했던 기억이 새롭다. 

1963년에 상경해서는 뚝섬에 진외가가 있어서 가끔 갔었는데 그 일대는 모두 농사를 짓고 있었고 호박 넝쿨을 올린 울타리 안에는 내가 사는 시골과 똑같이 오이와 상추를 기르고 있었다. 

이때 건국대 앞에 사는 고향 선배에게 놀러 갔는데 골프장이 있었고, 일반 버스가 없어 버스비가 다섯 배나 비싼 마이크로버스로 간 선배 자취방에는 전기가 들어오질 않아 시골과 다름이 없었다. 하기는 그때 건국대 주변은 평탄한 농지였다. 당시 옥수동과 한남동 경계에 있던 단국대학교는 왕십리역에서 걸어갔는데 경의선 철로를 따라가다가 금호동에서 길을 틀어 가면 판자집이 많이 있었고 그 옆에는 농사를 짓고 있었다. 

마장동에서 백열등은 살 수 있으나 형광등을 사려면 소위 성동 원두라 부르는 서울운동장 근처까지 걸어서 다녀왔으니 지금과 비교하면 세상이 몇 번 변한 셈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내가 지금부터 반세기 전후 왕십리역 일대를 회상해 본 것 자체가 의미도 없고 사치였나 생각된다. 성동구청을 가는 동안과 접견실에서 잠시 새삼스럽게 반세기 전을 돌이켜 보았다. 

이런 생각을 하던 시공 간에서 구청장과의 짧은 만남이 있었다. 구민 아니 시민을 위한 열과 성이 느껴져 고마웠다. 
이번에 공시가가 14년 만에 최고의 인상률을 보여 아우성이라 하는데 성동구는 중산층의 경계로 볼 수도 있는 주택 가격 6억 원 이상의 비율이 높아 강남구, 서초구 다음이라고 한다. 강남, 서초 지구가 경기도이던 시절 천호동 지구, 영등포와 더불어 서울의 최남단으로 어렵게 살던 성동구, 비가 많이 오면 청계천 나무다리가 없어져서 10명도 못 타는 작은 배로 돈을 내야 건넜고 마장동 우시장에 소가 거래되었던 성동구가 현재는 교통의 요지, 멋진 건물과 한강을 낀 좋은 환경 지구로 성장하여 50년대와 60년대에는 꿈도 못 꾸던 그런 곳이 되었다.  

오늘 성동구청을 가는 동안은 추억 속에 성동의 환경을 돌이켜 보았고, 접견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갑자기 두 편의 미래를 그린 영화가 생각났다. 코로나 이전에 극장에서 본 '인터스텔라'는 3차원과 4차원이 공존해서 나타나는 SF영화인데 인간의 사고 영역을 넓혀준 영화였다. 또 하나는 며칠 전 집에서 넷플릭스를 이용해서 본 '프로메테우스'로 인간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고 지구는 인류의 보금자리로 얼마나 오래 지탱할 수 있는가를 다룬 영화였다. 사실 너무 비약할 것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이니까 내 고장 성동을 더 좋은 생활의 터전이 되게 하는 것이 여기 사는 지금 우리의 할 일이고 이것이 확대되면 우리나라와 지구 전체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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