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계단참에 있는 남자
<수필> 계단참에 있는 남자
  • 성광일보
  • 승인 2021.03.31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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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순
서정순/수필가
서정순/수필가

모임을 끝내고 서둘러 지하철역을 향해 걸었다. 찬바람을 피해 을지로입구역 계단을 뛰다시피 내려가다 순간적으로 발을 멈췄다. 세상에, 계단참에 빨래가 널려 있는 게 아닌가.

일자로 꺾인 스테인리스 손잡이에 검은 양말 두 짝과 내복 한 벌이 널려 있었다. 내복의 물기가 아래로 내려가 있는 걸 보니 널어놓은 지 한참 된 것 같았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초저녁에는 널지 못했을 텐데, 언제 어디서 빨래를 했을까. 더 놀라운 것은 빨래가 널려 있는 계단참에 50대 중반쯤 돼 보이는 남자가 털 귀마개를 하고 침낭 위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모임에서 들떠 있던 몸과 마음이 그를 본 순간 갑자기 서늘해졌다. 머리맡에는 하얀 수건으로 덮어 놓은 배낭이 있었다. 아마도 베개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반듯하고 깔끔한 성격인 듯 그는 넥타이를 맨 단정한 양복 차림이었다. 퇴근해서 집으로 막 돌아온 사람 같았다.

그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다가설 용기가 없었다. 옆모습만으로도 물기가 아른거리는 눈빛이 그려졌다. 과거로의 파노라마를 펼치고 있을 것만 같은 그는 정면을 응시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에게 기쁨을 주고 사랑받은 기억, 한 여인의 남편으로 아이들의 아버지로 행복했던 그 시간과 그 공간을 넘나들며 춥고 배고픔을 달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사나운 겨울바람의 위세는 휑한 계단참에 있는 그를 밤새 괴롭힐 것이 분명했다. 그 작은 침낭이 그를 지켜줄 수 있을까, 나의 오지랖이 발동했다. 그는 왜 계단참보다 아늑할 지하도로 내려가지 않았을까, 단순히 빨아놓은 내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비록 노숙은 하지만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는 자존심으로 버티고 있는 걸까. 노숙자 신세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그 중간지점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힘겹게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오래전 영등포역에서 본 노숙자들이 떠올랐다. 출근시간 영등포역 뒤쪽 에스컬레이터는 오줌으로 얼룩지고 암모니아 냄새가 진동하여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래서 계단을 이용하곤 했는데, 영하의 날씨에 계단 밑에서 아침부터 소주를 마시다가 벌떡 일어나 “천 원만”하고 시커먼 손을 내밀면 무섭기도 했다.

그가 계단참에서 탈출하여 일상으로 돌아갈지, 버티지 못하고 지하로 내려갈지는 순전히 그의 선택이지만, 그곳에 오기까지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그의 눈에 있는 물기를 머금은 바람 냄새는 종종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나를 따라왔지만 뒤돌아보지 못했다. 아니 마주치기 겁이 나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른다.

어느 친구는 봄에 바람이 부는 이유를 “잠자고 있는 나무들을 깨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봄바람이 마치 늦잠 자는 아이를 깨우는 엄마의 손짓과 같다면, 겨울바람이 부는 것도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계단참에 있는 그를 일으켜 집으로 돌아가게 하는 따뜻한 손짓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승강구를 내려가 경쾌한 음악소리와 쌩한 바람을 몰로 온 지하철을 탔다.

출입구 쪽에 서서 보니 창밖은 검은 스크린이 되어 독립영화를 상영 중이었다. 시작한 지 한참 되었는지 빨래를 널어놓은 계단참에 앉아 있는 그가 주인공이다. 그의 인생을 그려내는 시나리오 작가와 감독은 주인공에게 시련의 시간을 주어 안간힘으로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반전 효과를 주려고 그를 계단참에 앉혀 놓은 것이 아니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빈병을 재활용하면 꽃병으로 거듭나게도 하지만, 한순간에 깨서 흉기로 돌변하면 그 흉기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자신을 다치게 할 수 있다.”
어느 분이 노숙자를 빈 병에 비유한 말이다. 그 영화 시나리오 작가에게 부탁하고 싶다. '틀림없이 행복해진다'는 꽃말을 지닌 은방울꽃을 가득 꽂은 꽃병으로 거듭나 계단참에서 벌떡 일어나는 해피엔딩이 되게 해달라고. 그때 나는 기립박수를 보낼 준비가 되어 있다.

<서정순 프로필>
·광진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느티나무문우회 회원
·수필집 《60, 내 생의 쉼표》 외 공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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