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땅 대신 공장 키우고 일도 많이 했다. 축구도 좋았고….
성수동? 땅 대신 공장 키우고 일도 많이 했다. 축구도 좋았고….
  • 원동업 기자
  • 승인 2021.04.10 09: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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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이야기 자서전 : 전)재일프라이머리 대표 이재일

개성 부호 할아버지, 무일푼으로 시작한 부모님, 일하고 사랑하는 게 인생

이재일 대표는 할아버지나 부모님과 다른 길 걸었고, 아들딸 역시 다른 길을 간다. 하지만 영향은 서로에 끼치고 사랑 역시나 그렇다.
이재일 대표는 할아버지나 부모님과 다른 길 걸었고, 아들딸 역시 다른 길을 간다. 하지만 영향은 서로에 끼치고 사랑 역시나 그렇다.

1950년 6월 중순께. 개성에서 크게 가구공장을 하시던 할아버지(이상철)는 개성 인근 땅을 50만 평 매입했다. 가구에 칠하는 옻을 구하기 위한 조림단지였다. 그리고 일주일 뒤 터져버린 전쟁. 할아버지는 50톤짜리 배 두 척을 빌려 강화도 위편에 배를 대고 살림을 모두 실어두었다. 가족들과 함께 남으로 피난을 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정작 가족들이 도착했을 때 배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개성 땅 50만평 옻나무 심었던 할아버지, 밀가루 져 날랐던 엄마

당시 결혼을 했던 아버지(이인형)는 3대 독자. 북쪽서 나은 아이 셋을 데리고 강화로 피난한다. “전쟁이 끝나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우리 가족은 강화에 뿌리를 내리기로 했다. 아버지는 양도면 사무소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밀가루 배급 담당. 미군의 원조로 들어온 ‘밀가루’는 당시 우리의 배고픔을 달래준 귀한 음식재료였다. 어머니(강귀점)는 큰 양은 다라를 머리에 이고, 거기 가득 밀가루를 담아 집으로 날랐다. 아홉 남매를 길러야 했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했다. 힘도 셌다. 쌀 한가마를 머리에 이고 다닐 정도였다. 남대문에서 쟁반을 열 개씩이 차곡차곡 올리고 배달을 나가는 아주매들을 보고도 엄마는 간단히 “저 뭐라고?” 한마디 하곤 했다. 엄마는 또아리 없이도 그게 가능한 사람이었다. 단옷날 답청을 하러 산에 갈 때면, 어머니는 세 개씩 묶은 댓병 짜리 소주를 머리에 이곤 했다. 두 손에 가득 삶은 고기며 과일 보따리를 든 상태였다. 마을 사람들이 턱을 빠뜨린 채 그 모습을 보곤 했다.

어머니는 계의 오야(우두머리, 계의 책임자)도 맡았다. 10여개 쯤의 계주였는데, 관리가 쉬운 게 아니었다. 어머니의 기억력과 암산 능력이 한 몫을 했다. 아버지는 주판을 돌리고, 어머니는 암산으로 계산을 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어머니가 늘 먼저 답을 냈다. 아버지가 뒤늦게 ‘맞네!’하고 감탄을 했다. 어머니에겐 주변서 자주 ‘돈을 맡아 달라!’는 이들이 있었다. 불려달라는 것. 1.5부를 약속하고, 어머니는 그 돈을 3부로 돌려 돈을 융통했다. 그 돈으로 땅을 사고 농사를 지었다. 자식들도 열심히 일했다.

큰누님은 강화서 사진관을 운영했다. 전쟁 이후부터 인구가 점차 불어난 강화는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선거인만 8만 가까이로 늘었다. 해병대가 주둔하고 군시설도 많았다. 방적공장과 기타 제조업들도 여럿 입주해 있었다. 그들이 모두 가족을 이루고 학교에 아이들을 보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사진관 손님들이었다. 사람들은 기념사진을 찍었다. 연찬회, 체육대회, 창립기념일, 입학식과 졸업식, 소풍과 운동회…. 모든 활동마다 사진은 필수적인 의례요, 코스였다. 사람 수대로 인화해서 나누어 갖는 시대 아닌가.

누나가 매형과 함께 운영한 송림사진관서 나도 일했다. 해병대2사단 방위로 근무한 나는 서울 충무로로 필름을 들고 현상과 인화를 많이 하러 왔다. 마진이 많이 남는 좋은 장사였다. 사업거리를 찾아보자.” 서울은 강화보다 훨씬 더 큰 세계였다.

브라질로 축구유학을 다녀온 아들 수호. 풋볼웨이 아카데미는 옛 공장 건물에 새 옷을 입히고, 시설을 직접 했다.
브라질로 축구유학을 다녀온 아들 수호. 풋볼웨이 아카데미는 옛 공장 건물에 새 옷을 입히고, 시설을 직접 했다.

협력업체 가득한 성동 성수서 본격적으로 도장업 시작

형과 나는 용산경찰서 앞쪽 원효로 등지의 공장에 처음 안착했다. 거기 철길을 따라서 수없이 많은 작은 공장들이 있었다. 항차 우리 사업을 하자는 생각을 했으므로, 형과 나는 꼼꼼하게 일을 배웠고, 곧 독립해 공장할 곳을 찾았다. ‘성수동’으로 자리를 잡은 것은 준공업지역이라 여전히 공장을 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롯데 캐슬 아파트가 들어서있던 곳에 공장을 임대해 우리는 사업을 시작했다. 형이 대표인 사장이 되어 앞에 서고, 나는 뒤와 현장을 주로 맡았다.

사업엔 쉼 없이 돈이 들어갔다. 공장 임대료를 내고, 공장의 설비를 만들고, 직원을 뽑아 월급을 주고, 복지시설을 꾸리고, 자재를 사야했다. 실적이 아직 없으니 신용이 있을 리도 없고, 임대공장이 담보가 될 수도 없었다. 어머니에게 손을 벌리는 게 민망하고 미안했지만,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500만원은 사업을 시작한 1980년도 중반경엔 큰 돈이었다. “이번에 한번만!” 그렇게 세 번쯤이나, 나는 어머니와 연락을 하고 돈을 받아 오곤 했다.

사람을 쓰고 만나고 대하는 일은 사업 중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공장을 확장하며 형이 데려온 이들과 나는, 안 맞았다. 은행 가고, 협력업체 찾고 연구자들 기술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려야할 형은 자주 다방에 가 앉아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가리봉서 데려온 그들이 곁에 있었다. “1천만원만 더!” 받아오라고 형이 다시 시켰을 때, 더 참기가 어려웠다. 겨우 소주 한두 잔이면 뻗는 내가, 그날 회식에선 ‘반 병’ 넘게 마셨다. 지금은 아이템플이 있던 흥성사료 앞 사거리서 성수동 패거리들과 시비가 붙었다. 허세와 객기가 가득한 건 그들이나 우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놈들은 맥주병을 깨서 내게 던졌다. 내 왼쪽 눈 주위로 둥굴게 맥주병 깨진 동그라미가 마크를 냈다.

유치장에 들어가 있을 때, 내가 오히려 가해자가 됐다. 그쪽 공장 사장이 힘깨나 쓰는 기관에 연이 닿아 그랬다 했다. 가족이 변호사를 샀다. 나온 뒤, 형에게 선언했다. “내가 일을 하겠소. 영업도 내가 하겠소!” 보증금은 까먹고 어음이 돌아오고 있는 때였다. 형이 손을 털고 나갔고, 나는 거래처 모두에 전화했다. 3개월 어음의 유예와 더 많은 주문을 그들이 내게 해 주었다. 날 믿어준 것이다. 나갈 이들을 보내고 내게 남은 노동자들과 자재들을 끌어모아 일을 마쳤다. 절박하면 통하는 법. 차츰 일은 자리를 잡아갔다.

내가 하는 일은 도장업이었다. 그렇다. 주로 금속 제품 표면을 페인트로 칠해 외관의 다시 꾸미고 산소를 차단해 산화를 방지하고, 때로 물을 막고 오염을 차단하는 작업. 서로 다른 재질의 제품에 서로 다른 색과 형질을 가진 도료를 입히는 일. 단순하지만 동시에 전문성이 요하는 일이었다. 액체 도장에서 분채(가루) 도장으로 업계의 시스템이 넘어가고 있는 때라 적응도 해야 했다. 붓칠에서 뿌리는 락카로, 분채로 뿌리고 열처리를 하는 단계로 넘어갈 때마다 공장은 확장과 시설의 변형이 필요했다. 사업은 자전거처럼, 핸들질과 페달질을 멈추면 안 됐다. 그렇게 내 청춘이 달리며 흘러갔다.

도장협과 청우축구회, 우리들은 우리들의 사회 안에서 행복했다

이 작은 사회에도 사회가 있다. 그 역할 하는 이를 힘껏 밀어주었다. 그들이 나를 또 그만큼 밀어주곤 했다. 성수동서 사업을 하면서 애정을 가진 단체는 두 개였다. 하나는 도장업협회. 나는 성동구에 있던 많은 이들과 함께 한국도장기술협회 성동지회를 만들었다. 같은 일을 하는 이들은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같은 처지에 있는 동지들이었다. 권익을 지키고, 함께 애환과 고충을 나누는 친구들은 언제나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가 축구회, 내가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청우축구회. 어쩌면 그곳 사람들이 나의 찐 친구들인지도 모른다. 1981년에 창단을 했으니까, 청우축구회가 만들어진 지는 올해로 딱 40년이 되었다. 같이 축구를 하자고 우리 회사 공장장이 내 소매를 끌었다. 가보니 고향 강화사람이 넷. 고향에나 온 것처럼 반가웠다. 축구회는 매주 일요일이면 새벽부터 모여 성수중서 공을 찼다. 코로나19로 사람들 모임이 금지되기 이전까지, 그렇게 땅을 차고 공을 차고, 이쪽으로 저쪽으로 정신없이 뛰다보면 매일매일 나를 짓눌렀던 사업의 어려움을 이겨나갈 힘이 충전되곤 했다. 나는 축구가 정말 좋았다. 그러니 아들이 지금 축구의 길을 걷는 게 아닐까? 아들 수호는 브라질로 축구유학을 떠날 만큼 축구를 잘하고 또 좋아했다. 아들의 이야긴 언젠가 아들이 할 때가 있겠지.

1987년 11월. 도장기술협회 성동지회 창립에 손을 걷었다. 경쟁자면서 같은 비를 맞는 최고의 동지들이다.

참, 내가 한 일은 도장일만은 아니었다. 나는 여러 제품을 제작하고 도구도 직접 만들어서 썼다. 아마 나와 같은 많은 공장 사람들이 그렇게 할 것이다. 제품 중 하나는 바비큐 기계. 회식을 하느라 자주 삼겹살을 굽는 회사 사람들을 위해 자동으로 꼬치가 돌아가는 기계를 제작했다. 작은 모터와 변속기를 연결하고 송풍기와 버너를 배치하고, 뚜껑을 여닫을 수 있게 했다. 식당서 먹는 삼겹살보다 직접 공장 마당서 굽는 삼겹살을 직원들을 훨씬 더 좋아했다. 도장에 쓰던 부스장과 건조실도 직접 만들던 솜씨였으니까, 그런 기계쯤은 도면만 그린 다음에 재료를 주문해다 만들었다.

내 작품 중에는 서울시의 여섯 개 구청이 1~2천여만 원씩 들여 주문했던 물건도 있다. 바로 담배꽁초를 담는 벽걸이형 쓰레기통. 길을 가다보면 배수구에 버려진 담배꽁초가 얼마나 많은가. 플라스틱 사출은 마장동서 하고, 금형은 뚝섬역 부근 공장에 의뢰하고, 시보리(조르개)는 성수동서 맞출 수 있었다. 제품 개발 후에는 의장과 디자인 특허까지 마쳤지만 사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금새 우리 제품을 따라 한 제품이 나왔지만, 법적인 소송을 걸어 손해를 구제하기에는 우리가 할 수고가 너무 많았다.

1994년 청우축구회 동대문운동장. 우리가 매주 모인 성수중에 김주성이 축구부였다. 설기현 선수도 우리들은 뒤에서 지원했다.
1994년 청우축구회 동대문운동장. 우리가 매주 모인 성수중에 김주성이 축구부였다. 설기현 선수도 우리들은 뒤에서 지원했다.

근래엔 사고로 손가락을 잃었다. 순식간이었다. 늘 조심하지만, 신호를 잘못 이해한 지게차 기사가 쇳덩이를 내 손가락에 내리고 말았다. 하나는 접합해 붙였지만, 다른 하나는 고쳐 쓸 수 없을 만큼 망가졌다. 나를 쫓아다녀(정말이다. 처음엔 인정하더니 나중엔 자신이 언제 그랬냐며 웃기만 하던) 결혼했던 아내가 사고를 당했다. 방송에 나올 만큼 큰 사고였고, 언제나 내 곁에 있을 것 같던 아내가 하늘로 먼저 떠나고 말았다.

사업을 접으려던 찰라, 이번엔 아들이 손을 내밀었다. 풋살장을 하자는 거였다. 이번엔 아들과 의기투합했다. 그곳을 꾸릴 때, 내 손이 곳곳에 갔다. 아들도 나처럼 임대를 하는 처지라 많은 돈을 시설에 투자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허술한 공장 외관이라고 안까지 그럴 것이라 상상해선 안 된다. 어린이들이, 그네들의 엄마들이, 멀리서 오는 젊은 여성들까지 이 공간을 보면 맘껏 흡족해 한다. 1층에, 이렇게나 넓은 실내축구장(풋살장)은 처음이기 때문일 거다.

나는 강화로 내려가 살고, 텃밭도 가꾸며 지낸다. 그래도 아들을 도우러, 축구가 그리워, 자주 서울에 온다. ‘성수동서 큰 공장을 했다니, 돈도 많이 벌고 땅도 많이 샀겠네요!’ 하고 사람들은 묻는다. 한때 은행서 돈을 대출해 줄 테니 땅을 사라고 나를 쫓아다닌 적도 있었다. 그때 그 말을 들었더라면 정말 좋을 뻔했지. 땅 살 기회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돈이 생길 때마다 공장을 더 크게 확장을 하고,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데 썼다. 아들의 유학도 어디 그냥 가게된 것이던가?

그러니 후회는 없다. 땅은 없지만 나는 함께 했던 공장 식구들 축구회 사람들과 비지땀 소금땀도 흘렸다. 좋은 제품을 만들어 납품하고 판매했다. 일을 똑바로 처리하고, 전화가 오면 5년전 사람이라도 그 목소리를 기억하고 이름을 떠올렸다. 그는 반갑고 고마워했다. 인생, 이러면 충분한 거지.

성동풋볼웨이 아카데미 : 전화 010-9645-0707
주소 : 서울 성동구 뚝섬로1길 18(성수동1가 656-1244) 카우앤독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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