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 필] 경허의 호열자
[수 필] 경허의 호열자
  • 성광일보
  • 승인 2021.05.10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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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순/성동문인협회 명예회장
임길순/성동문인협회 명예회장

2020년에 1879년 여름으로간다. 계룡산 동학사에서 경전에 막힘없는 대강사(代講師)로 이름을 떨치던 9척 장신의 젊은 경허(鏡虛, 1849~1912) 스님이 경기도 안양 근교의 청계사로 향하고 있었다. 청계사에 계신 계허 스승이 환속해서 대목수로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스승을 보기 위해 길을 떠났다. 천안쯤 도착 했을 때 날은 저물기 시작했고 그를 집어 삼킬 기세로 비바람이 몰아쳐 한 발자국도 내딛기 어려웠다. 비를 피해 어느 초가집의 처마 끝에 새가 날개 접듯이 몸을 맡겼다. 사방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장대비가 쏟아졌다. 앞집에서 송장을 업고 나오는 남자를 만났다. 경허를 본 그는 혀를 차며 호열자가 돌아 사람이 다 죽어나가는 판인데 당신은 뭣 하러 이 마을에 들어왔느냐며 당신도 살아서 나가기 어렵겠다며 혀를 끌끌 찼다.

비를 피하느라 미처 주위를 살필 겨를이 없었던 경허는 마을이 이미 죽은 듯 흉흉하다는 걸 알았다. 그는 세찬 비바람 속에 두려움과 공포에 질린 초라한 모습으로 마을을 벗어났다. 혼비백산하여 그곳을 어떻게 벗어났는지도 모른 채 비를 피할 수 있는 나무 아래서 한숨을 돌리고 나니 온몸에는 땀이 흐르고 오한이 났다. 이제 자신도 몹쓸 전염병이 옮아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을 향해서 오고 있다는 공포에 떨었다. 

그는 청계사로 가던 걸음을 동학사로 돌려 자신이 가르치던 제자들을 다 흩어 버리고 방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호열자에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호열자에 걸려 죽어 나가는 송장과 다를 바 없는 육체, 살고 죽는 문제도 수습할 줄 모르면서 자신이 가르치던 경전은 교리문자(敎理文子)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많은 경전을 읽었고 뜻을 이해했고 후학들에게 8년 가까이 가르쳤던 그였다. 살고 싶으면 어서 마을을 떠나라는 남자의 말에 그가 알았다고 여겼던 생과 사는 오간데 없고 허겁지겁 마을을 떠났다.

여사미거 마사도래(驢事未去 馬事到來)
(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닥쳐왔다.)

경허는 이 화두로 석 달 동안 죽은 송장처럼 참구(參究)했다. 7월에 시작 됐으니 석 달이 지나자 산 중에는 겨울이 왔다. 
이때 경허의 시중을 들던 행자는 마을 이 진사의 아들이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로 몰락한 양반들이 지방으로 많이 내려와 있었다. 이 진사도 그런 몰락한 양반이었다. 아들에게 유가의 학문보다 불문에 들여 행자 수업을 하게 했다. 나이 어린 행자의 눈에 경허는 움직이지 않는 바위와 같았다. 

 하루는 동학사 스님들이 탁발을 나가게 되었다. 이 진사의 아들 동은도 대중 스님과 탁발을 나가 아버지의 집에 들렀다. 이 진사와 함께 갔던 학명 스님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저녁 한때를 보내던 중이었다. 이 진사가 중노릇 잘못하면 죽어서 소가 된다는 말에 학명 스님은 어찌하면 소가 되지 않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죽어서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가 되면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답을 했다. 그 뜻을 알 수 없었던 학명은 경허를 시봉하는 동은에게 고삐 뚫을 구멍이 없는 소의 뜻을 경허에게 물으라한다. 

동은이 경허에게 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소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바로 그 순간 이었다. 경허는 활연대오(豁然大悟), 물아(物我)가 공(空)한 도리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육신을 초탈하여 작은 일에 걸리지 않고 마음대로 자제하여 대자유를 깨달았다. 경허는 이 순간을 이렇게 오도송으로 읊었다.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문득 깨닫고 보니 삼천 대천 세계가 다 내 집이로구나. 
2020년 경자년의 봄이다. 새해에 들어서면서부터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경허의 호열자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가 사는 동안 나귀의 일도 해결하지 못했는데 말의 일이 닥쳐오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경허를 쫓아 충남 서산에 있는 연암산의 천장암에 갔다. 경허가 피했던 장맛비는 아니지만, 봄비가 마른 땅에 푸석푸석 소리를 낸다. 개나리가 비를 맞고 희망이라는 노란소리를 낸다. 제비꽃이 무더기로 피었다. 대웅전 앞 화단에 자기 사랑이, 자존감이 생명이라는 노란 수선화가 새초롬하다. 봄의 울타리들 말고는 절집에서 사람을 만나기 어렵다. 지난 가을에 찾았을 때는 커다란 고무대야에 도토리 가루 걸러내는 일을 물가에서 거들고 있던 스님을 만났다. 어느 해에는 녹차를 마시면서 담소도 나눴다. 오늘은 산중의 정적만이 봄놀이의 벗이 되어주었다. 수선화를 닮은 동행한 벗들도 함구하고 산새들도 함구했다. 묵중한 침묵으로 닫혀 있던 경허가 수행하던 방문을 열었다.

경허의 방(圓成門)을 열고 들어가 영전에 삼배의 예를 갖추고 좌복에 앉았다. 방은 내가 두 팔을 벌릴 수 없을 정도로 작다. 이 작은 공간에서 광기처럼 깨어있던 경허의 힘을 조금이라도 느껴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경허의 방에는 경허밖에 없다. 불전함도 없고 향을 피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만 원짜리 세장이 한쪽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누군가가 다녀가면서 전쟁 아닌 전쟁이 종식되기를 기원하며 놓았을까. 나도 주머니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같은 기원을 해본다. 몸만 겨우 뉠 수 있는 곳. 불뚝불뚝 욕심이 올라올 때마다 작은 방에서 집착하지 말자고 마음을 다잡곤 했다. 만 원짜리 한 장으로 코로나의 번뇌를 놓고 가는 것 같아 뒤가 부끄럽다.

경허는 이곳에서 이십여 년 가까이 머물렀다. 경허 스님의 방 바로 옆에는 수월, 만공, 혜월 스님이 머물던 방이 있다. 이곳에서 차례로 경허의 제자가 되었다. 한암 스님도 제일 늦게 경허의 제자가 되었다. 

경허가 두려움에 떨었던 호열자가 지나간 지 140여 년이 지났다. 전염병은 정복 되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코로나19가 생겼고 전파력이 너무 강해 사회적 거리두기, 물리적 거리두기 캠페인이 생겼다. 만남을 자제하고 각자의 공간에서 칩거하듯 생활을 해보니 더불어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알게 되었다. 

지금도 확진자는 계속 늘어나고 사망자도 늘고 있다. 그곳에서 봉사 하고 있는 의사들과 간호사들,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각 분야의 봉사자들은 아비규환의 보살들이다. 간절하면 통한다고 했으니 하루빨리 코로나가 멈추기를 소원하며 그들에게 두 손 모아 합장으로 존경을 표하고 싶다. 

경허는 호열자로 죽어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자신이 벗어나지 못한 생사의 문제를  경전의 문자를 버리고 화두를 끌어안고 백척간두에 선 몸부림 끝에 자유자재했다. 지금은 원성문 방문 앞에 기념비를 세우고 잔디도 깔아 놓았지만, 삼십여 년 전 처음 찾았을 때는 연암산에 제비집처럼 앉은 암자였다. 경허가 살던 시대의 천장암(天藏庵)을 상상해 본다. 천장암, 하늘 속에 감춘다는 명산에서 경허가 삼복더위에 방문을 열어 놓고 잠을 즐기던 어느 여름이었다. 

만공 스님이 경허 스승의 잠자는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다. 경허의 배 위에 시커먼 뱀이 걸쳐있는 게 아닌가. 만공의 놀란 소리를 들은 스승은 가만히 두어라, 놀다 가게. 어린 스님 월면(만공)도 경허라는 스승을 만났으니 도인이 된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것이 호열자로 인해 깨달음을 얻은 후 근대 한국불교사에서 선종의 중흥조로 불리며 자유자재 했던 경허의 일이었다. 이러한 경허가 함경도 갑산, 강계 지방을 돌며 남긴 선시 중에 이런 시가 있다.

세상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은가.
봄볕이 이르는 곳에는 꽃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
경자년 봄, 나의 일은 무엇일까. 운 좋게도 만공의 제자였던 원담(수덕사 방장) 스님이 열반하시기 전에 손수 써 주신 경허의 열반게송(涅槃偈頌)이 내방 한쪽 벽에 있었다. 뜻을 헤아리기 어려웠던 열반송이 2020년 경자년 봄 코로나19로 우울함에 시달리던 네게로 와서 나의 일이 되었다.

심월고원(心月孤圓) 마음 달 홀로 둥글어
광탄망상(光呑萬像) 그 빛 만상을 삼켰어라
광경구망(光境俱亡) 빛과 경계 다 공한데
부시하물(復是何物) 다시 이 무슨 물건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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