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아차산이 들려주는 것들
(수필) 아차산이 들려주는 것들
  • 성광일보
  • 승인 2021.05.1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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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녀/수필가
김선녀
김선녀

아차산에 오른다. 한강 둘레길을 걷는다. 일상에서 시간을 따로 내서 운동을 하기는 내 삶이 좀 팍팍하다. 살을 빼려면 헬스장을 정기적으로 이용하거나 PT(Personal Training) 같은 전문가의 도움이 효과적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런 것은 엄두가 생기지 않는다. 비용도 부담스럽지만, 일정한 시간을 따로 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꼭 살을 뺄 목적이 아니더라도 이젠 건강을 관리해야 할 나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묘안이다. 휴일 오전엔 반드시 아차산 산행으로 하루를 열 것, 출근 때나 퇴근 때 시간 여유가 되면 한강 둘레길을 이용할 것이다.

십 년 전쯤 면역력이 떨어져 바이러스성 질환으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진 적이 있다. 그 병에 걸리기 전까지 건강에는 자신 있다고 큰소리 아닌 큰소리를 치곤 했는데, 막상 병상 생활을 하게 되니 나이 들었음을 실감했던 것 같다. 한 달간의 투병 시간을 보내고 그때부터 시작한 운동이었다. 처음에는 천변 길을 산책하듯이 걸어 출근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두어 시간씩 걸었던 일이 몸에 자극이 되었는지 운동을 하지 않았던 때보다 체력이 좋아지고 기분도 상쾌해졌다. 자연히 생활에도 활력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꾸준히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원래 산을 년 중 행사처럼 서너 차례 정도 올랐다. 운동하기 전에는 등산은 모임이나 친구들 만났을 때나 특별히 즐기는 경험인 줄 알았다. 한번 다녀와서는 일주일쯤 허벅지나 장딴지 통증을 겪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는데 아차산을 올라 보니, 그 정도 산행은 산책처럼 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아침마다 천변 길 산책에 나서듯이 산을 매일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산도 처음 올랐을 때는 숨이 턱까지 차올라 괴로웠지만 몇 차례 오르니 그 정도가 나아졌고 몇 주 지나지 않아 다른 산인들의 걸음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다.

산을 오른다는 것은 강가를 산책할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걸음걸이도 다르고, 보고 느끼는 것도 다르다. 능선에서 평지를 내려다보는 재미와 맛도 다르다. 산이냐, 강이냐, 어디가 더 좋다 할 수는 없다.

아차산을 오르면서 만나는 나무, 풀, 청설모, 딱따구리 소리 또 이름을 알 수 없는 새들의 지저귐 등이 날마다 새롭다. 산을 오르고 내려오면서 스쳐 지나는 사람과도 초면 같지가 않다. 그런저런 느낌이 좋아 정기적으로 산행에 나서게 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오를 때 못 본 것을 내려오며 보게 되는 것이 있고 어제 보지 못한 것을 오늘 보게 되는 것도 있다. 산에서 얻은 즐거움 중 하나를 꼽으라면 우연히 엿듣게 된 남의 이야기도 빠뜨릴 수가 없다.

언젠가는 바위가 우락부락한 경사진 곳을 조심스럽게 발 닿을 곳을 찾으며 오르고 있었다. 앞서가는 내 또래 두 남자도 조심하느라 걸음이 더뎠다. 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자 하니 내외끼리 서로 알고 지낸 지 오랜 지기 친구 같았다. 한 사람이 친구를 나무라듯이 훈계를 하는데 엿듣던 내가 마치 혼나는 사람의 아내라도 된 듯이 속이 다 후련했다.

이 사람아, 내가 자네 집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아니까 하는 말인데, 아침에 국이 뭐 그렇게 중요해. 자네 집사람도 밖에서 종일 일하고 돌아오잖아. 여자들도 집에 들어오면 얼마나 귀찮고 힘들겠어. 자네 만나서 지금껏 한 번도 쉰 적 없이 마트 일 해오지 않았나. 나이 쉰이면 여자들도 슬슬 꾀가 날 때라고! 자네가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사다 끓이면 되지. 요즘 좀 잘 나와. 마트 가면 물만 붓고 끓일 수 있게 다 돼 나오는데 먹고 싶은 것 있으면 퇴근길에 사다 끓여놓고 아침에 한술 뜨고 출근하면 되지. 그런 걸 갖고 집사람한테 불만을 표출하고 그러나.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짐작으로 미뤄 보건대 친구가 집사람이 아침을 성의 없이 차려준다고 푸념했다가 된통 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박쥐처럼 남의 말이나 엿듣는 염치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또래 남자들의 이야기인 데다가 아내 이야기라 빠져들어 나도 모르게 속도 조절을 하며 듣고 있었다. 묵묵히 듣고만 있는 남자가 좀 측은해 보이기는 했지만, 친구 하나는 정말 제대로 두셨네 하는 마음이었다.

산행 동안 무상무념일 때도 있고 눈에 닿는 하나, 하나를 다 음미하며 사색을 즐길 때도 있다. 바쁜 일 없지만, 속도를 내 걷고 싶은 날이 있다. 유난히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날, 공중부양을 느끼며 걷는 게 신나고 즐겁다. 박자, 음정 다 무시한 채 콧노래 흥얼대며 무아 세계에 빠져든다. 이런 날은 그 많은 산인의 소리에 신경 쓰지 않는다. 어쩌면 자연의 소리도 감성에 녹아들어 분리된 소리로 못 들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느껴지는 날도 있다. 몸이 특별히 무거운 것은 아니지만 내 의지로 움직이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드는 날은 눈에 들어오는 온갖 것에 신경이 쓰이고 귀도 열려 있는 것 같다. 미세한 숲의 소리까지 감지된다. 곤충이나 애벌레 움직임까지 감지되는 듯한 날이다. 그런 날 지나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웃음소리까지 다 들린다.

때로는 사람들을 관찰할 때가 있다. 혼자 산행 중인 사람의 몸놀림을 보며 공중부양 중인지, 사색 중인지 판단해 볼 때가 있다. 신기하게도 걸음걸이만 봐도 보이는 것 같다. 물론 그게 딱 맞다 할 수는 없다. 본인들에게 사실 확인을 한 적은 없고 내 감상일 뿐이다.

삼삼오오 무리 지어 오기도 하지만 친구끼리 오는 사람도 많은 편인데 연인이나 부부 말고 동성 친구끼리 산행 중인 사람들 이야기가 잘 들린다. 특히 여자들 이야기보다는 남자들 이야기에 귀가 따라갈 때가 잦다.

또 한번은 내려오는 길에 친구로 보이는 두 남자의 대화를 엿듣게 된 적이 있다. 그날도 작정하고 박쥐가 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거침없는 호탕한 말투와 웃음소리에 시선이 갔다.

야, 난 우리 엄마 때문에 미치겠다. 요즘 현장이 엄마 집 근처라서 거기서 다니거든, 집에서는 현장 새벽 출근이 어렵지 않냐. 그래서 엄마한테서 있는데 새벽마다 아침을 차려주는 거야. 어제는 평소보다 일찍 나오게 돼서 노인네 주무시는 것 보고 조심조심 나섰거든, 그런데 전화를 해서 아침도 안 먹고 출근하게 했다며 우시는 거야. 집에서 다닐 수도 없고 한동안 엄마랑 있어야 하는데 정말 미치겠다.

친구의 말을 듣던 한 친구 왈, 야, 세상 엄마들이 다 그렇지 뭐. 그래도 우리 엄마는 전혀 그런 걱정은 안 하시잖냐. 내가 식당 한 후로 생전 밥걱정은 안 하시지. 아예 맛있는 반찬 안 해 오냐며 농담을 하실 때가 있다니까. 하며 한바탕 웃는데 뒤따라 걷던 나도 우리 엄마를 떠올리며 혼자서 빙긋이 웃었다.

가끔 시댁 험담하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지인이나 친인척과 다툰 일을 듣기도 한다. 아, 그리고 또 있다. 한번은 시한부 인생이 된 친구를 위해 친구들을 불러모으는 중년 남자의 통화 내용을 듣게 된 적이 있는데 약수터 벤치에 앉아서 그 이야기를 듣다가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픈 친구와 둘이 만 아는 비밀로 한 이야기지만 차마 비밀로 할 수 없어 알린다며 작은 모임을 주선하는 내용이었다. 죽기 전에 함께 할 시간을 만들고 싶은 친구들에게 사연을 전달하는 남자의 진심이 느껴져 콧등이 시큰거렸다.

아차산은 내게 자연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지만 이렇게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또 어떤 이야기들을 듣게 될까. 아차산을 오르는 이유다.

김선녀 프로필
광진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광진문인협회 회원
광진문인협회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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