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트라우마(Trauma)
[수필] 트라우마(Trauma)
  • 성광일보
  • 승인 2021.07.13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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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모
수필, 성동문인협회 회원
홍성모

일전에 미국에서 살다 귀국한 조카딸의 살림집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딸을 낳고 3년이 지나도록 그리 멀지 않은 동네 APT에 사는데도 자주 찾아갈 기회가 없었다. 마침 시골에서 포도농장을 하신다는 사돈어른이 오신다 하기에 인사도 드릴 겸 가게 되었다. 
어려서 외국 생활을 했으니 제대로 살림이나 하는지, 산후조리 중에 잠깐 본 손녀가 얼마나 자랐는지도 궁금했다. 

현관에 들어서니 당연히 엄마품에 안겨 있을 손녀가 안 보인다. “애, 어디 갔니?” 거실에 앉으며 묻는 말에 조카딸은 사돈어른의 전화를 받으면서 한쪽을 가리킨다. 
대체로 APT의 구조는 주방에 찬장이며 붙박이장들이 이어져 있으니 자연스럽게 둘러보게 되었다. 30평대라 세 식구 살림하기엔 좁지 않아 보였고 아기자기 꾸며놓은 가구들이 젊은이들 취향에 맞게 빛이 났다. 
그런데 조카가 가리키는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어디 있어?” “저기요.” “저기라니?” 가만히 보니 어디서 애 우는 소리가 들린다. 벽면에 갈라진 틈 사이에 아이 키만 한 여닫이 고리가 달린 문짝이 보였다. “아니 저기도 방이냐?” “아냐요.” “그럼 무어냐, 애 우는소리가 나는데...” 다가가서고리를 여니 쪼그리고 앉아 흐느끼는 아이가 보인다. “아니 이게 뭐야, 아이를...” 이런 꼴을 보니 기가 막혀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서양에는 페닉룸(Panic room)이라고 하여 싸움이 잦았던 중세 시대 성의 꼭대기에는 비밀히 조그맣게 방을 만들어 공주 같은 귀한 사람을 숨겼다고 한다. 영화에서도 주택에 따로 방을 만들고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도둑이나 살인자로부터 안전하게 대피하였다가 인상착의를 경찰에 알려 범인을 잡는 경우를 본다. 우리나라 APT에는 이런 시설은 없고 화재 발생 때 옆집으로 대피할 수 있게 만들어진 공간이나, 거실 한편 짜투리에 청소도구 따위를 넣고 쓰게 조그만 벽장을 설치한 경우는 있다. 
조카딸의 말로는 유치원에 가기 전이라 많은 시간을 집안에서 지내게 되는데       

여자 아이면서도 사내애 뺨치게 장난이 심해서 매를 대고 야단을 쳐도 그때뿐이고 어쩌다 손님이 온다고 청소라도 하려면 별수 없이 억지로 저 안에 들어가게 한단다.
불현듯 일제의 항거하던 우리 민족의 독립투사들을 죄인으로 다룰 때 놈들은 극악무도하게도 앉았다 설 수만 있도록 좁은 감방을 만들었던 서대문 형무소가 연상되는 순간이었다. 
트라우마(Traum)라는 말이 생각났다. 의학용어로는 '외상(外傷)을 뜻하나 심리학에서는 영구적 정신 장애를 남기는 충격'으로 표현한다. 오스트리아의 신경과 의사이며 정신분석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에 의하면 잠재된 사건이 유사한 사건이 다시 주어지면 이 두 개의 인자가 사후적으로 환기되어 병인(病因)을 완성하는데 이것이 트라우마로 나타난다고 한다. 증상은 다양하여 삶에서 자신감이나 자존감을 잃고, 극심한 스트레스와 해당 사건이 지속적으로 머릿속에서 생각나고, 꿈을 꾸는 듯 하거나 현실에 대한 무관심, 불안, 초조(焦燥) 등을 겪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정신과 의사들의 상담사례를 보면 어린 시절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당했던 경험이 나이들면서 사람을 사귀기 싫어하게 되고, 두려움으로 인해 상사와의 관계가 소홀하여 직장 생활을 어렵게 만들어 차츰 우울증으로 발전한 경우라든지, 초등학교 때 성추행을 당한 여인이 후유증으로 신혼생활이 힘들고 가끔 가슴이 조이듯 통증과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사례, 어둠을 싫어하여 잠들 때는 전등을 밝게 켜야 공포감을 이길 수 있다는 사람, 대인기피증으로 길거리에서 사람과의 시선이 마주치면 자신도 모르게 피하고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든지, 장녀이면서 엄마와의 대화를 극도로 기피하는 사례는 고된 시집살이를 겪던 엄마가 딸이 어릴 때 잘못한 일에 매를 든 것이 원인으로 엄격한 시어머니와 비교하면서 생긴 트라우마라고 한다.   

비록 실제를 못 느낀다고 하더라도 생명체가 있는 존재는 누구나 각종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고 한다.
조카딸을 보면서 자식은 부모를 대물림한다는 속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나이가 되도록 내가 겪은 수많은 일들이 우리 자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내가 트라우마의 실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슨 노력을 해야 하는지 천착(穿鑿)해 봐야 겠다.                             
때늦은 잔소리를 길게 하고는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조카딸과 손녀에 배웅을 받았다. 그리고 손녀가 10년 아니 20년 후에라도 폐소공포증 같은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간절한 기원을 하면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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