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군 편에 서야 했던 첫째는 살아남고, 진압군 편에 섰다가 참수당하는 둘째를 지켜봐야 했던 아비, 피눈물 어린 공신녹권 이야기
반란군 편에 서야 했던 첫째는 살아남고, 진압군 편에 섰다가 참수당하는 둘째를 지켜봐야 했던 아비, 피눈물 어린 공신녹권 이야기
  • 서성원 기자
  • 승인 2021.08.05 1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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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원의 엉뚱 발랄 성동 이야기] (29) 보물 1282호, 최유련 개국원종공신녹권(崔有漣開國原從功臣錄券)
최유련 개국원종공신녹권(崔有漣開國原從功臣錄券)의 첫머리다. 보관 중에 외부에 노출되는 부분이어서 종이 상태가 좋지 않다. Ⓒ서성원
최유련 개국원종공신녹권(崔有漣開國原從功臣錄券)의 첫머리다. 보관 중에 외부에 노출되는 부분이어서 종이 상태가 좋지 않다. Ⓒ서성원

○ 소재지: 서울 성동구 성수동 강릉최씨종친회 서울지회

공신녹권은 가로로 길다. 이 길이의 다섯 배쯤으로 보면 되겠다. Ⓒ서성원

◆ 보물찾기, 최유련개국원종공신녹권(崔有漣開國原從功臣錄券)

성동구에는 국보는 없고 보물만 2건이다. 살곶이다리와 최유련개국원종공신녹권이다. 최유련개국원종공신녹권은 사유물이다. 그래서 이 보물을 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올해 봄이다. 옥수동 미타사에 서울시 지정 문화재가 있다. 취재하려고 몇 번이나 부탁했지만 헛일이었다.

강릉최씨종친회 서울사무소에 보물이 있었다. 그곳으로 전화를 했다. 결번이었다. 강릉으로 전화를 했다. 강릉최씨종친회였다. 서울지회 사무국장의 전화를 알려줬다. 최우철 씨였다. 여러 번의 통화 끝에 최우철 사무국장이 나섰다. 보물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21년 8월 2일 성수동 강릉최씨종친회 서울지회 사무실에서 드디어 보물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숭례문 화재 사고 이후, 문화재청에서 보물 보관 확인 전화도 자주 온다고 한다. 금고에 보관된 보물과 마주했다. 폭염이 계속되는 날이었고 최우철 씨는 성북에서 달려왔다. 고마웠다.

강릉최씨종친회 서울지회 사무국장 최우철 씨가 보물을 설명하고 있다. Ⓒ서성원
강릉최씨종친회 서울지부 현판. Ⓒ서성원
강릉최씨종친회 서울지부 현판. Ⓒ서성원

◆ 최유련개국원종공신녹권

-발급경위

개국원종공신은 1392년(태조 1) 10월부터 4년 2월까지 13회에 걸쳐 포상했다. 수차례에 걸쳐 포상 하교된 원종공신의 인원은 문헌상으로 1,698명에 달한다. 최유련이 녹권을 받을 때에는 105명이 공신녹권을 받았다. 1395년(태조 4) 3월 7일에 각 녹권에 등재할 공신을 확정하고 우승지(右承旨) 민여익(閔汝翼)이 왕지(王旨)를 받들어 발급하였다. 녹권의 끝 부분에는 공신도감의 관여자들이 각기 자신의 직명단자(職名單子)란에 서압(署押)하여 녹권을 사급(賜給)한다는 내용이 있는데, 공신도감 관여자 17명 가운데 16명이 서압(署押)하였다.

-구성과 형태

사급자(賜給者)의 성명과 신분, 7회에 걸친 공신들의 공적 내용과 포상지시(褒賞指示) 및 처리 내용과 함께 녹권을 받은 105명의 공신 명단과 포상 내용, 녹권 발급에 관여한 담당 관원의 직함(職銜)과 성명 및 서압(署押)에 이르는 내용이 모두 208항에 걸쳐 필서(筆書)되어 있다. 녹권의 지질(紙質)은 저지(楮紙)이며, 보존 상태는 원문의 훼손이 거의 없고 양호한 편이다. 규격은 세로 31㎝×가로 635㎝이며, 매장의 길이는 44.3㎝~72.2㎝(끝장 24㎝)이다. 매장은 24행으로 16~18자씩 한문과 이두문으로 쓰여 있고, 매 행간은 2.8~3㎝이다. 9개소에 6.7㎝×6.5㎝의 ‘이조지인(吏曹之印)’이 찍혀 있다.

-내용

1행으로부터 ① 공신도감, ② 공신, ③ 정헌대부(正憲大夫)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로 치사(致仕), ④ 최유련(崔有漣), ⑤ 본관(本貫)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공신호 난에는 여타 개국원종공신녹권과 마찬가지로 ‘공신(功臣)’자(字)만 기재되어 있고, 본관 난에는 ‘본관(本貫)’이라고만 되어 있을 뿐 본관의 지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또한 같은 해에 발급된 정진(鄭津), 한노개(韓奴介), 문계종(文係宗), 김회련(金懷練), 진충귀(陳忠貴), 장관(張寬) 등의 녹권과 동종(同種)이다. 그러나 이들 녹권에 수록되어 있는 공신수와 포상 내역, 숫자 표기 등을 비교해 보면 약간의 차이가 난다. 또 발급 관계자 가운데 정랑(正朗) 2명 중 1명만 표기되고 1명이 공란인 점에서 차이가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개국원종공신녹권은 1698명에게 나갔지만 현재 7부만 남았다. 58명에게 포상한 개국공신녹권은 1부만 남아 있으니 문화재로서 가치가 높다.

공신녹권 최종 끝부분. Ⓒ서성원

◆ 참수된 둘째, 개국 조선에서 영광을 누리는 첫째아들을 둔 아비 이야기

삽화 작가 30°C

1388년 고려 우왕 때다. 1월 15일에 최영은 문하시중에 앉았다. 임금과 맞먹는 권력을 가졌다. 그해 4월, 이성계를 선봉장으로 해서 명의 요동을 정벌하라고 고려군을 출정시켰다. 그런데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벼슬을 가진 이들은 넋이 나갔고, 백성들까지 우왕좌왕했다. 최유련은 관직에 서른 해쯤 있었다. 그때도 평장사(정2품, 장관급)였으니 나라의 위기는 곧 자신의 위험이었다. 두 아들 역시 관직에 있었다. 인편으로 급히 간찰(편지)을 보냈다. ‘피바람이 불어오는구나. 아비로 해서 너희들 목숨이 위태롭다. 다 내려놓고 산속으로 떠나자꾸나. 살길은 이것뿐이다.’ 두 아들이 아버지 최유련을 찾아왔다. 첫째 최이(崔怡)는 32살 판도전법 총랑이다. 둘째 최지(崔遲)는 30살 좌우위 호군(좌우위:개경 수비군대)이다.

첫째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최영 문하시중만 믿었다가 낭패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살아남으려면 …….”

세상을 벗어나야 살 수 있다는데 무슨 말이냐는 듯, 첫째아들을 바라보았다.

동생 최지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형님은 최영 편으로 가십시오. 전 이성계 장군쪽으로 가겠습니다. 그래야 아버지를 …….”

최유련이 펄쩍 뛰면서 말했다.
“안 된다. 버려야 살 수 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숨는다고 될 일도 아닌 듯 합니다.”

형이 동생에게 말했다.
“내가 이 장군 편에 설 테니 넌 최 장군을 모셔라. 넌, 좌우위 소속이니까 그게 쉬울 거다. 형으로서 명령이다!”

최유련은 두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동생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 첫째가 위험한 반역자 이성계 편을 선택했다. 그에 비해 최영은 누가 봐도 안전지대였다.

5월, 이성계가 개경을 손아귀에 넣었다. 형의 배려로 최영 장군에게로 갔던 최지는 12월, 최영과 함께 목이 잘리고 말았다.

1391년(고려), 최이는 삼사우윤일 때 삼사좌윤이었던 이방원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1392년에 이성계가 임금 자리에 앉았다. 조선이다. 새 나라에서 최유련은 경상도병마절제사를 맡았다. 아들의 음덕이었다. 최유련은 71세, 정치를 그만두고 싶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후에 참찬문하부사까지 되었다. 1395년 가을, 태조 4년에 최유련은 개국원종공신녹권을 받았다. 길고 긴 두루마리였다. 주위 사람들의 축하 인사가 쏟아졌다. 새로운 왕조와 더불어 앞날 창창한 그들을 부러워했다. 달 밝은 어느 날 밤, 최유련은 공신녹권을 천천히 풀었다. 75세의 가녀린 어깨가 조금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최영과 함께 형장에서 사라진 둘째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반란과 개국의 시절, 숨을 쉬고 있는 자신이 싫고도 싫었다. 달이 기울고 밤은 깊어갔다.

공신녹권의 끝부분인데 담당자 관직명과 성명과 수결(싸인)이 보인다. Ⓒ서성원

◆ 보물이 세상에 나오기까지

최유련의 개국원종공신녹권은 후손들이 보관했다. 조선 시대가 가고 경기도 여주시 산북면 용담리 최상석 씨 집에 있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피난가면서 장독 밑에 숨겨놨다. 피난에서 돌아왔을 때 집은 잿더미만 남았다. 항아리를 들췄더니 보물은 무사했다. 1996쯤, 고문서 문건을 가지고 있다고 종친회 모임에서 얘기를 꺼냈다. 최지영 회장과 문화재 관련 기관에서 근무하던 총무가 중심이 되어서 문화재청에 감정을 요청했다. 1998년 보물로 지정을 받았다.

이 녹권이 가치는 조선 전기 개국공신에게 어떻게 대우했는지, 개국에 영향을 미친 인물 연구, 공신록의 양식, 이두문의 사용과 문체 등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위키백과는 밝히고 있다.

이렇게 두루마리다. Ⓒ서성원

◆ 많은 국민들이 볼 수 있는 보물이 되기를

공신녹권은 관계 기관에서 보수해서 지금은 상태가 나아졌다. 그리고 현재는 재경 종친회 최은철 회장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보관, 관리하고 있다. 보물은 종친회 소유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종친회의 중론이라고 한다. 종친회는 영인본을 보관하고 진본은 공공기관에서 맡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2018년쯤에 영인본 제작을 성동구에서 추진하다가 지금은 중지된 상태라고 한다. 국보는 국가에서 관리하고 보물 관리, 보수는 지자체가 맡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하면서 관계 기관에서 나서주기를 바란다고 최 사무국장은 말했다.

이 공신녹권은 가로 6미터가 넘는 문서이기 때문에 개인이 보관, 관리한다면 금고 속에 고이 넣어둘 공산이 크다. 성동구 기관에서 보관하는 유물, 자료들을 모아서 성동구역사관을 만들면 어떨까 싶다. 이 보물을 성동구에 있는 한양대 박물관에서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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