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공간에 대한 기억
[에세이] 공간에 대한 기억
  • 성광일보
  • 승인 2021.08.11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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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효은/성동신문 기자
어효은

대학생 때부터 다음날 일정을 적어놓는 습관이 있었다. 다이어리를 보면 'Go 장소'라고 적힌 메모가 눈에 띈다. 장소를 먼저 적고 해야 할 일을 적었다. 무언가를 하기 위해 일단은 내 두 다리로 어디든 가야 한다. 일하는 공간으로 갔다가 식사를 하러 가고 다시 일을 마무리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빨래와 청소를 한다. 온종일 같은 공간에서 일하느라 공간 이동이 거의 없는 사람도 있고 하루에도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지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외로운 방랑객처럼 이곳저곳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5년간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이곳저곳 다양한 공간을 두드렸다. 용기와 자립심을 키워갈 수 있는 경험들이었다. 자유로운 여행가가 되고 싶었던 나는 순간순간을 즐기며 제각각 다른 빛을 내며 반짝이는 존재를 탐구하고 탐험하고 싶었다.

20대 후반, 트라우마 상담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상담 선생님은 내가 느끼기에 큰 안정감을 주고 편안함을 느끼는 공간을 떠올려보라고 했다. 편안한 공간을 떠올려보려고 애를 썼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문득 한 공간이 떠올랐는데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리븐델이라는 곳이었다. 그곳은 치유의 공간이었다. 프로도가 칼에 찔려 생사를 오갈 때 다친 그를 살리기 위해 도착한 곳이다. 아무 걱정 없는 곳, 완전한 쉼의 공간, 따스한 햇볕이 적당히 스며들고 편안한 기운 흘러넘치는 곳이다. 자애로운 사람들이 모여있고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이 부족함 없이 채워진다. 폭신하고 깨끗한 침대에서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자세로 푹 쉴 수 있다. 자연 속에 있어서 고요하고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다. 자연히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편안한 공간이다.

언제나 이런 공간을 꿈꾸며 살았던 것 같다. 리븐델 만큼은 아니지만 내게도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공간이 있다면 카페, 서점을 꼽고 싶다. 책이 있는 북카페라면 더욱 좋다. 그곳에 식물이 있으면 생기를 느낀다. 언젠가 내 공간이 생긴다면 식물을 키우고 작은 서재를 만들고 싶다. 넓은 창이 있어 그곳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공간이면 좋겠다. 포근한 느낌의 잠자리가 있고 편안한 의자에 앉아 나무로 된 책상 위 일기장을 꺼내어 글을 끄적이는 모습을 그려본다. 부드럽고 은은하게 방을 비춰주는 조명 아래 아로마 향초를 켠다. 고요하게 호흡하며 나와 대화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공간을 꿈꾼다.

서울에서 생활하며 고시원, 하숙집, 자취, 청년 주택 등 다양한 공간을 경험했다. 몹시도 외로워서 문밖으로 외로움이 흘러넘치던 공간도 있었고 함께 해서 따듯함을 느끼던 공간도 있었다. 처음 나만의 공간을 만나 은은한 조명과 향초를 피우기도 했다. 어떤 공간은 그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과 닮아간다. 공간이 변화함에 따라 변화하는 내 모습을 돌아본다. 

지금은 서울을 떠나 강원도 시골집에 와있다. 주로 반나절 정도 일을 하고 집 청소와 요리를 한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바닷길을 산책한다. 빠르면 몇 달 길면 몇 년 안에 공간의 변화가 생길 것 같다. 공간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은 삶에도 파도처럼 변화의 물결이 밀려오는 신호가 될 수 있다. 새로운 공간에서 만날 인연과 이야기가 궁금하고 또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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