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겨울 꽃 이야기
[소설] 겨울 꽃 이야기
  • 성광일보
  • 승인 2021.08.30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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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당/
소설가, 시인·성동문인협회 이사
김근당/소설가,

아홉 살이 되었으므로 그곳에서 나와야 했습니다. 그것이 고아원의 규칙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일정한 잠자리도 마땅한 일자리도 없었습니다. 낯설고 두려운 서울이었습니다. 당신은 거리를 헤매다 짓고 있는 건물의 지하에서 자기도 했고 판자촌의 쪽방이나 간신히 몸을 눕힐 다락방을 전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공사판에서 잡일을 했고 중국집 배달원과 이십사 시 편의점에서 야간 일도 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당신은 직업과 잠자리가 보장되는 직업군인(장기하사)에 대해 알게 되었지요. 

하사관 학교에서 소정의 훈련을 받은 당신은 하사 계급장을 달고 최전방을 지키는 사단師團의 하급부대 통신대에 배속 받았습니다. 진부령 가까이 첩첩산중에 있는 부대였습니다. 멀지 않은 최전방에서는 무장공비가 나타나 아군을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이야기가 분분한 살벌한 곳이었지요. 당신이 소속된 대대에서도 일부 전투중대는 최전방 DMZ경비에 차출되어 막사가 비어있기도 했습니다. 당신도 통신시설 수리 팀을 따라 한 번 가본 DMZ는 맨눈으로도 북한군 진지가 건너다보이고 그들의 방송이 쨍쨍하게 울리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전방에는 겨울도 일찍 찾아왔습니다. 당신이 시월 중순에 배속 받아 갔을 때도 겨울바람이 매섭더니 십일월이 들어서자 눈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내리는 눈도 서울과 달랐습니다. 눈송이의 크기는 물론 쏟아지는 눈발도 앞을 분간하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삼일 간을 내리 퍼부은 뒤였습니다. 연병장은 치워도, 치워도 발목이 묻힐 정도로 눈이 쌓였고 식당으로 가는 길과 보급소와 무기고로 가는 길만 빤할 뿐 그 외는 어디나 사람의 무릎까지 빠지는 눈의 세상이었습니다. 

대대에 긴급 명령이 떨어진 것은 눈이 그친 다음 날이었습니다. 당신은 잘 몰랐지만 통신대에서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최전방에 있는 연대본부와 후방에 있는 사단본부를 이어주는 통신 중계소에 기름이 떨어져 발전기를 돌릴 수 없고, 그로인해 통신시설이 마비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산'에 있는 중계소에 평시에는 차로 기름을 공급했지만 갑자기 내린 눈으로 차가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일개 소대의 소대원이 기름을 통에 넣어 어깨에 메고 가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통신대에서도 통신병이 따라가야 했습니다. 등에 기름통을 메고 무릎까지 차는 눈길을 헤치며 무산까지 가는 소대원의 진행상황과 안전사항을 대대본부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눈 속의 행군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행군을 이끄는 중사(안내자)를 따라 길을 찾아간다 해도 장딴지까지 빠지고 때로는 무릎까지 빠지는 행군이었습니다. 서른아홉 명이 일렬종대로 걸어가는 길이도 삼십 미터를 넘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은 매섭고 산길은 험했습니다. 산을 넘어 분지를 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곳은 개천이 흐르고 있는 곳이다! 나를 따라 다리를 잘 건너라! 옆으로 발을 헛디디면 개천에 빠져 황천객이 될 수도 있다!”
제일 앞쪽에서 중사의 큰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봐도 개천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곳이나 하얀 눈이 평평하게 깔려 있을 뿐이었습니다. 대열의 제일 뒤에서 무전기를 메고 뒤처지는 소대원들을 관리하며 따라가는 당신은 낙오자들 때문에 뒤쳐졌고 바람이 지우는 발자국을 따라가기에 바빴습니다. 집들이 띄엄띄엄 보이는, 그러나 서로 왕래한 흔적이 없는 분지를 지나자 높은 산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대열은 높은 산의 오부 능선을 돌아가야 했습니다. 밑으로는 까마득하게 뻗어 내려간 눈 비탈이었습니다. 그래도 중사가 이끄는 대열은 길을 잘 찾아갔습니다. 오부 능선을 돌아가자 또 깊은 산중이었습니다. 앞으로도 옆으로도 높은 산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의 무전기에 신호음이 울렸습니다. 대열의 제일 앞에서 중사와 함께 가던 병장 무전병이 대대본부와 통신이 두절되었으니 중간에 남아서 중계를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그 자리에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더지 본부! 두더지 본부! 여기는 두더지 투다. 중간에 남아 중계를 한다.”
“두더지 투! 감이 좋다. 계속 중계하라.”

처음에는 대대본부와도 중사와 함께 가는 무전병과도 잘 통했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산중에 혼자 남아 통신 중계를 계속했습니다.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소대원들이 산모퉁이를 완전히 돌아가 당신의 시야에서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뒤였습니다. 중사와 함께 가는 '두더지 원'과 통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대대본부를 불러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두더지 원은 높은 산 때문에 통신이 두절됐다 해도 잘 통하던 대대본부와 통신이 되지 않는 것은 이상했습니다. 당신은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해는 점점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점심을 먹지 못한데다 눈 속을 헤매느라 기진맥진한 당신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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