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수필] 지금 이대로의 모습으로
  • 성광일보
  • 승인 2021.09.1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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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미라/시인, 성동문인협회 회원
황미라/

한겨울에도 졸졸 끊이지 않는 계곡물 소리를 따라 점점 산속으로 들어간다. 바위를 타고 내리는 물은 조그마한 소에서 잠시 머물렀다 다시 흐른다. 잔뜩 습기 머금은 바위에 다양한 종류의 이끼들이 서식하고 있다. 산이 깊어질수록 아기자기한 기암괴석들이 이어진다. 신선이 된 듯 노닐다 보니 목적지까지 가는 시간은 더뎌지기만 하다. 

마침내 사찰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이다. 두 갈래 길에서 철계단이 아닌 옛길을 선택했다. 두 손 두 발로 바위 벼랑길을 올라 바윗길을 통과하고 돌계단을 오르니 바로 우화루다.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어떤 것도 통과하지 않았는데 무턱대고 우화루를 만났다.  

화암사 오는 길은 굳이 의례를 행하지 않아도 세속의 번뇌가 잊히는 곳인가.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로 가는 길에 무임승차한 기분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우화루를 한참 살펴보다 발걸음을 뗀다. 불전이 있는 경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화루 옆으로 이어진 문간채 문을 통과해야 한다. 우화루 1층은 돌벽으로 막혀 있다.

화암사는 가운데 마당을 두고 남북으로 우화루와 극락전, 동서로 불명암과 적묵당 네 개의 전각으로 둘려져 있다. 문간채 입구에서 시작하는 길은 오른쪽은 우화루 왼쪽은 적묵당과·극락전으로 이어져 마당을 밟지 않고도 다 둘러볼 수 있다. 공간이 좁다 보니 극락전과 적묵당의 추녀마루가 겹치거나, 적묵당 지붕과 우화루 지붕이 이어져 있다. 이채롭다.

우화루는 보물 662호이며 조선 광해군 3년(1611)까지 여러 번에 걸쳐 수리되었다. 우화루는 단청이 없다. 화려하지 않지만 이끌림이 있다. 우화루에는 좁은 절 내부를 보완한 장치가 두 개 있다. 하나는 차경이다. 우화루 문을 열면 안팎 경계는 허물어지고 바깥 풍경까지 액자 하나에 담을 수 있는 어울림이다. 또 하나는 우화루 2층 바닥 높이를 안마당 높이에 맞춘 것이다. 흙과 나무의 연결이지만 이질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마당을 두 배로 넓히는 효과뿐 아니라 다른 용도로 활용하기에 유용할 것 같다. 목어도 볼만하다. 색이 입혀지지 않은 목어의 나뭇결이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그대로 살아있다. 

극락전은 국보 316호이며 우화루와 마주 보고 있다. 여러 차례 수리되었지만 정유재란 때 불탔던 극락전은 1605년(선조 38)에 시작하여 그 이듬해 중건되었다. 극락전이 아주 특별한 이유는 국내 유일의 하앙식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지붕의 하중을 받는 공포 위에 하앙을 덧댄 후 도리를 얹는다. 서까래를 건물의 바깥쪽으로 길게 뽑을 수 있어 지붕이 길고 높다. 일조량이 많은 지역에서 내부로 햇빛이 덜 들어오게 하는 구조라고 한다. 백제계 건축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일본학자들은 하앙식이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 중국에서 바로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1976년 화암사 극락전 하앙식이 발견되면서 그들의 주장은 틀렸음이 증명되었다. 화암사 극락전 하앙은 용머리를 부재로 하고 여의주를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다. 건물 뒤편 하양은 용의 꼬리 모양이다. 극락전에서 색다른 또 하나는 현판이다. 글씨가 하나의 현판에 씌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글자씩 떨어져 있다. 

극락전도 우화루처럼 단청이 퇴색되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처마 아래 공포와 공포 사이에 그려진 '주악천인상'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비파·생황·거문고·장구·북·피리 등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하고 춤추며 부처님을 기리고 공양하면 불도를 이룬다고 한다. 나풀거리는 비천상의 옷자락을 보고 있으면 나도 덩달아 날고 있는 기분이다. 그래서일까. 목이 꺾기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자꾸 올려보게 된다. 극락전 불단 위 닫집도 눈여겨 볼만하다. 하앙식 공포 덕분에 천장이 높아 용과 동자상, 봉황과 4색의 구름 등을 통해 극락의 모습을 더욱 자유롭게 표현하였다.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 살아있는 듯한 용의 눈빛에서 역동성이 느껴진다. 

극락전 옆에 철영재라는 사당이 있다. 퇴락해가는 화암사를 중창(1425~1440) 불사한 성달생의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해 사당을 짓고 위패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성달생은 무과 출신으로 전라관찰사 겸 병마절도사, 삼번절제사, 도총사, 별운검, 평안도관찰사, 공조판서, 중추원판사 등 여러 관직을 거쳤다. 성달생이 공조판서 때인 세종 9년(1427)에 17세인 딸이 명나라에 4차 공녀로 간택되었다. 명나라에 간 딸의 안녕을 빌기 위해 적당한 사찰을 찾던 중 화암사를 알맞은 곳으로 정했다. 조선 세종은 억불숭유정책으로 전국에 36개 사찰만 남기고 강제 철거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화암사는 성달생 덕분에 존폐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성달생은 사육신 성삼문의 조부다. 세조 때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아들 성승, 손자 성삼문 등이 처형당하자 연좌법에 의해 그의 묘소가 훼손되었다. 1433년 성달생의 글씨로 법화경을 화암사에서 판각해 출간하였다. 

불명암에 앉아 맞은편 적묵당을 바라본다. 적묵당 낮은 기단이 비스듬하다. 높이를 고르지 않아 오히려 눈에 걸림이 없다. 화암사는 자연스러움이다. 초석은 크기나 모양이 다르다. 기둥도 두께나 길이가 다르다. 구부러진 기둥은 자르고 끼워서 세웠다. 무심한 듯 턱 놓인 작은 돌계단마저도 자연스러움에 한몫 더한다. 옹색하지 않고, 난잡하지 않다. 화암사는 퇴색함 그대로다. 단청을 새로 입히지 않아 애잔함과 따뜻함이 공존한다. 화암사 안마당으로 햇살이 쏟아진다. 극락전 기단에 걸터앉아 햇살을 받는다. 조각나 흩어진 마음들이 한 곳으로 모인다. 무작정 머무르고 싶다.

산신각이 출입금지라 직접 보지 못한 아쉬움을 앉고 해우소가 있는 야트막한 언덕으로 올랐다. <화암사 중창비>가 있다. 15세기 이전 화암사 역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다. 이 비는 조선 세종 23년(1441)에 비문을 지었고, 선조 5년(1527)에 세웠다. 마모되어 글씨가 잘 보이지 않는다. 비문은 신라 원효(625~702)와 의상(617~686)이 중국과 인도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이 절에서 머물면서 수도했다는 기록이다.

얼굴을 강타하는 마른 나뭇가지들의 공격을 두 팔로 방어하며 언덕을 더 올라가니 화암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돌담이 사찰을 빙 둘러 감싸고 있다. 전각들이 오밀조밀 서로 지붕이 겹치거나 맞대고 모여 있다. 좁은 출입문과 우화루 2층 바닥까지 쌓아 올린 돌벽을 보면 화암사는 절이라기보다 요새 같다. 곁을 내주기 위해 지어진 것 같지 않다. 애초에 그랬던 것일까 아니면 시간이 지나면서 어떤 이유로 변형된 것일까. 

청량한 풍경 소리가 풍경을 흔드는 바람을 따라 텅 빈 겨울 산골짜기를 동행한다. 저 멀리 물결 같은 산 능선이 겹겹이 쌓여 있다. 멀어질수록 경계가 흐릿해지니 마치 넓은 바다 같다. 그 풍경이 내 눈높이와 다르지 않으니 내가 서 있는 이곳도 꽤 높은가 보다. 임도를 따라 하산한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은 주차장까지 제법 멀지만 잘 닦여져 있다. 그런데 이 편함이 화암사에서 만큼은 좀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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