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겨울 꽃 이야기
[소설] 겨울 꽃 이야기
  • 성광일보
  • 승인 2021.09.1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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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당/소설가, 시인·성동문인협회 이사

매화꽃

김근당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할 수 없이 부대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다행히 오부 능선은 바람을 막아주는 산 때문인지 지나온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뿐이었습니다. 평지를 지나온 길은 바람에 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거기다 서쪽에 걸린 태양도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산속의 어둠은 빠르게 찾아왔습니다. 해가 넘어갔는가 싶었는데 캄캄한 어둠에 하얗게 깔린 눈빛에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무릎까지, 또 허리까지 빠지는 눈밭을 헤매었습니다. 행렬을 따라갈 때는 없었던 언덕 밑인 것 같았습니다. 어디에서 길을 잃었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겨우 언덕을 넘어서자 멀리 작은 불빛이 보였습니다. 눈 속에 숨어있는 매화꽃 같기도 하고 작은 봉창에 물든 등잔불 같기도 했습니다. 당신은 무작정 불빛을 향해 갔습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과 사투하면서 당신이 찾아간 집은 방이 하나뿐인 작은 초가집이었습니다. 당신은 토방에 들어서 눈을 털 겨를도 없이 사람을 불러보았습니다. 그러나 한참을 불러도 불 켜진 방에서 내다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신은 이상하게 생각되어 방문을 열었고, 방안의 풍경에 놀라 자빠질 번했습니다. 
한기가 도는 방문 앞에 마귀 같은 할머니가 앉아있고 방 가운데에 등잔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보니 아랫목이라고 생각되는 쪽에 아기가 검은 포대기로 둘둘 말려있었습니다. 당신은 처음에는 죽은 아이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할머니의 말을 듣고 보니 아이가 울 힘도 없이 늘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며칠을 굶었는지 다 죽어가는 할머니는 희미하게 말했습니다. 저애 어미 애비가 먹을 것을 구하러 외지에 나갔는데 눈에 막혀 오지 못한다고, 죽을 날이 가까운 나는 괜찮으니 저애만이라도 데려가 살려달라고. 

당신은 허겁지겁 방으로 뛰어 들어가 아기를 안고 나왔습니다. 발을 옮길 힘도 없던 당신에게서 어떻게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몰랐습니다. 당신은 아이를 안고 눈밭을 헤맸습니다. 극한의 피로 때문인지 당신의 코에서 코피가 뚝뚝 떨어졌습니다. 떨어진 코피는 하얀 눈밭에 붉은 꽃을 피웠습니다. 별빛으로 어둠을 밝히는 밤이었습니다.  

그렇게 눈밭을 헤매던 당신은 동틀 무렵에야 부대가 있는 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생각 끝에 통신대장 숙소로 들어갔습니다. 부대 주변 산 속에 지은 통나무집이었습니다. 황토로 두껍게 바른 벽과 군대 기름으로 넉넉하게 돌리는 보일러로 방은 훈훈했습니다. 당신의 방문을 받은 통신대당은 깜짝 놀랐습니다. 구조대를 보내 밤늦게까지 찾아도 찾지 못했던 사람이 마치 적에게 총을 맞은 듯 피범벅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거기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를 아이까지 안고 왔으니 말입니다. 

당신은 따뜻한 물과 건빵을 먹은 후에 통신대장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아이가 부모에게 돌아갈 때까지만 이곳에 있게 해달라고. 통신대장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우선은 아이를 살려야 했습니다. 아이에게는 식당에서 밥을 얻어다 죽을 끓여 먹였습니다. 세 살인지 네 살인지 아니면 다섯 살인지 나이도 분간할 수 없는 아이는 죽을 잘 받아먹었습니다. 낮에는 당신이 틈나는 대로 들여다보고 밤에는 주로 통신대장이 데리고 잤습니다. 때로는 당신도 아이와 함께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당신은 장기 하사였고, 통신대장의 배려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도 날이 갈수록 원기를 회복하며 사람 꼴을 찾아갔습니다.

문제가 생긴 것은 그 뒤였습니다. 열흘이 지나 쌓였던 눈이 어느 정도 녹고 부대 사정도 한가한 일요일에 당신이 찾아간 아이의 집은 텅 비어있었습니다.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갔다던 부모도 할머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할 수 없이 동네 이장 집을 찾아갔습니다. 겨우 다섯 집이 모여 살고 있는 동네였습니다. 이장이 말했습니다. 며칠 전에 돌아온 젊은 부부가 죽은 할머니를 땅에 묻고 살길을 찾아 어딘가로 떠났다고.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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