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인연이란
[수필] 인연이란
  • 성광일보
  • 승인 2021.10.07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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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춘윤
안춘윤 - 행정학 박사 - 광진구립도서관장 역임 - 나루아트 극장장 역임 - 광진문인협회 회장 - 에세이문학작가회 회원

낡은 핸드백을 꺼냈다. 손이 닿았던 곳은 가죽이 탈색되었고 손잡이 한 귀퉁이는 찢어졌다. 십여년 전 원하던 곳으로 발령받았을 때 자축하며 내가 나에게 선물했던 빨간색 가방이었다. 열정적으로 일했던 시간, 고단했던 시절의 흔적이 오롯이 새겨있었다. 가방 속에는 몇 가지 소품들이 먼지처럼 남아있었다.

그 안에 쓰다 남은 핸드크림이 보였다. 울컥 목이 메었다. 이년 전 여행갔을 때 지인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멍하니 그것을 들여다보다 손등에 발랐다. 여전히 향긋하고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오랜 시간을 뛰어넘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핸드크림, 그것을 건네주었던 사람이 이제 세상에 없는데 변함없이 품고 있는 향기가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지인은 크리스마스 날 한줌의 재가 되어 세상을 떠났다. 내게 하고 싶었던 말이 남았던 것일까, 뜬금없이 나타난 핸드크림에 내 마음이 순간 무너져 내렸다.

영정사진 속 그녀는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직 내게서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녀가 준 핸드크림을 마지막까지 짜서 발랐다. 슬픔처럼 향기가 방안에 퍼졌다. '사람이 향기로 기억되는 건 그리움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라는 노래가사가 마음을 울렸다. 길지 않았던 인연이 이렇게 끝난 것이었다.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지만 이야기가 통하는 동료. 죽음 앞에 서면 소소한 것들조차 회한으로 다가오는가 보다. 오랜 세월 함께했던 낡은 핸드백, 그 안에 빈 핸드크림을 넣어 의식을 치르듯 정성껏 쌌다. 떠나보내는 인연이지만 소중했었다고 내 마음을 같이 싸서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그러면서 사람도 물건도 정리하지 못하고 연연해하는 나를 돌아보았다. 옷장 안에는 20년도 더 된 캐시미어 블랙 코트가 있다. 핸드백을 정리하면서 오래된 코트를 함께 꺼내놓았다. 코트를 한참 들여다보며 망설이다 다시 옷장에 넣었다. 열정으로 빛나던 시절이 지나가듯 윤기 흐르던 검은 색은 깊이를 잃었다. 메말라가는 피부처럼 경직되고 빛바랜 가구처럼 윤기를 잃었다. 풍성하고 포근하게 전신을 감싸며 부드러운 선을 그리던 옷자락이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부드럽게 흐르던 선은 입가의 주름처럼 골이 지며 힘을 잃고 추레해졌다. 그나마 코트 뒤쪽 끝자락부분은 어느 겨울에 타버려서 상처를 잘라내듯 수선을 해야했다.

한때는 나의 트레이드마크 같았던 코트였다. 겨울바람에 코트깃을 세우고 검은망토처럼 풍성하게 주름진 옷자락을 우아하게 날리며 걸으면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이제 손끝에 닿는 감촉에는 여유와 넉넉함이 사라졌다, 삶에 지쳐버리고 추억을 되새기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한동안 꺼내보지도 않았다. 그래도 아주 가끔은 늦가을에 꺼내 입고 길을 걸었다. 그렇게 인연의 끈은 아직 나를 잡고 있어서일까 여전히 보내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정말 떠나 보내야하고 어떻게 떠나야 하는지도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보내면서도 그저 나는 떠나보내는 자리에 언제나 서 있는 사람인 줄 알았다. 한 시공간을 살아내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오늘이 언제나 보장되는 것은 아닌 것을, 수많은 세월을 보내면서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둔함이란.

나는 언젠가부터 인연이란 단어를 자주 입안으로 흘렸다. 스쳐 지나가는 모든 것들이 필연의 실타래 끝에서 한 가닥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서다. 사람도 집도 직업도 하다못해 작은 사물들도 돌아보면 그물망처럼 얽혀서 우연이 아니었구나 하고 새삼스럽기조차 했다.

인연이란 말은 떠난 자리에 향기로운 여운을 남겼다. 반면 운명이라는 말은 상처가 남겨지며 그 비장함으로 무게를 견디기 어려웠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숨결 같은 미미한 흔들림마저 잦아들면 인연이 거기까지였구나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면 조금은 견디기 쉬웠다. 반면 운명이었나 하면 안타까움에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그 그림자에서 헤어나오는데 나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한 단어가 주는 의미와 무게가 내게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걸어 온 길모퉁이마다 남겨진 흔적들은 제각각 다른 형태로 가슴에 남겨졌다.그러나 정작 흔적도 없이 스러져간 것들은 문밖에서 서성거리며 막연히 기다리기도 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간 세월은 아쉽고 서러운 것들을 남겨놓았는가 보다.

인연이란 말을 새삼 되새김하는 것은 잃어버렸던 것에 대한 서러움 같은 것이 아직 남아있어서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영원한 미생인지라 항상 이룬 것 없이 원점에 서있다고 상실감에 젖어 살았는지도 모른다. 실체도 없는 꿈을 꾸고, 내려놓는 삶을 살고자 하면서도 생에 대한 갈증에 여전히 목말라하고 있는 나는 무엇을 기다리며 사는걸까.

한 생의 사계절 중 가을에 서있는 나. 그 길에서 무심히 스쳐 보낸 작은 인연들에게 손을 내밀어본다. 욕망으로 흔들리기보다 이제는 깊은 울림이 있는 샘을 내 안에 갖고 싶다. 그리고 그저 걸어가는 길에 만나지는 모든 것들을 소중히 가슴에 담아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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