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언제 밥 한 끼 먹세
[수필] 언제 밥 한 끼 먹세
  • 성광일보
  • 승인 2022.01.13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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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률 / 수필가. 성동문인협회 이사
박병률 / 수필가

“언제 밥 한 끼 먹세!”
지난해 가을, 동창회 때 친구가 말했다.

“그려.”
내가 그러자고 했는데, 해가 바뀌어도 친구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올봄, 동창 모임에서 친구가 또 말했다. 

“내가 사는 수원으로 초대할게. 00 갈비가 유명하지 않은가!”
“자네가 부르면 열 일 제쳐 놓고 달려갈 거구먼.”

봄가을로 동창회가 있는데 친구가 평소에는 전화 한 통 없다가 모임에서 만나면 “언제 밥 한 번 먹세!”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학창 시절 3년 동안 같은 반이라 친하게 지냈다. 내가 가끔 전화로 친구 안부를 물을 때면 '언제 밥 한번 먹자, 술 한잔하자'는 둥 인사치레를 했다. 하지만 친구는, 나를 초대한다고 말만 꺼내놓고 전화 한 통 없었다. 
가을 동창회를 앞두고 친구한테 전화했다. 

“이번 토요일 동창회 모임에 올 건가?”
“그럼, 자네 얼굴 봐야지!”
“오매, 내 얼굴에 금딱지라도 붙었던가?”

친구가 내 얼굴을 보러 모임에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겹도록 고마웠다.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가로수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었네. 학교 운동장에 있던 은행나무도 단풍이 들었겠지? 미술 시간에 자네와 나, 둘이 나란히 앉아서 파스텔로 은행나무를 그렸어. 그 시절이 그립구먼.”
“자넨, 기억력 좋네!”

친구가 한마디 거들고 골프 이야기를 꺼냈다. 시합에서 '홀인원'을 했다나. 다른 때 같으면 '밥 한 끼 먹자'는 말을 먼저 했을 텐데 깜빡 잊은 모양이다. 친구한테 '초대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서 그런지, 이솝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두루미〉가 떠올랐다. 친구는 전화기에 대고 골프 이야기에 정신이 팔렸고, 나는 친구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여우와 두루미를 생각했다. 여우한테 당한 두루미가 다음날 여우를 초대했는데, 음식을 호리병에 담아서 여우를 골탕 먹이는 장면이 통쾌했다. 

여우는 두루미에게 맛있는 음식을 내주었어요/ 그런데 음식이 모두 납작한 접시에 담겨 있었어요/ 두루미의 긴 부리로는 음식을 먹을 수 없었어요/ 두루미는 서운했지만 꾹 참고 여우에게 말했어요/ “여우야, 내일은 내가 널 초대할게”/ 다음날 두루미는 호리병에 음식을 담아놓고 여우를 초대했어요~./

친구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중간에 내가 끼어들었다.
“나는 집안에 잔치가 있어서 이번 모임은 못 나갈 것 같네. 다음 주 토요일 저녁 어때? 우리 동네도 00 갈빗집이 있거든.”
“좋지.”

친구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느새 일주일이 흘렀다. 토요일 날, 초대한 친구를 만나러 보도블록 위를 걸어가는데 찬바람이 불었다. 플라타너스 단풍잎 하나가 내 머리 위로 뚝 떨어졌다. 단풍잎을 주워서 이리저리 살폈다. 나뭇잎의 지난 삶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갔다. 

봄에 새싹 돋아서 여름에 그늘을 만들고, 한여름 비바람이 몰아칠 때 참고 견딘 얼굴, 푸르고 팽팽하던 얼굴에 주름이 도드라져 종잇장처럼 가볍다. 지난 세월의 무게를 얼마나 간절하게 움켜쥐고 있는지 차마 버릴 수 없어, 낙엽을 손에 들고 00 갈빗집 문 앞까지 왔는데,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그날따라 이방인처럼 낯설었다. 이마에 생긴 주름살을 바라보며 서성거리다가 낙엽을 바람에 실려 보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직원이 창가로 안내했다. 자리를 잡고 소갈비와 술 한 병을 주문했다. 상차림이 한창일 때 친구가 막 도착했는데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뭐 이렇게 걸게 준비했어! 다음에 수원으로 초대할게, 밥 한 끼 먹세.”
“개구리 수염 날 때?”

개구리는 수염이 없어서 '개구리 수염이 나면 내가 초대를 받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농담 삼아 한마디 하고 휴대폰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이 친구! 나를 초대한다 해놓고 전화 한 통 없었지, 주소록에서 이름을 지워버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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