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사랑의 기쁨과 슬픔(끝)
[소설]사랑의 기쁨과 슬픔(끝)
  • 성광일보
  • 승인 2022.01.13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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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명규/
소설가, 번역가
성동문입협회 회원
곽명규/소설가, 번역가

폭포 위쪽에서 꿩의 울음소리가 들려왔었다. 그는 계단을 올라 폭포 위의 숲을 찾아 갔다. 나무들 사이로 한참을 기웃거리며 숲속을 들여다보다가 얼핏 장끼 한 마리를 발견했다. 빨간 머리, 알록달록한 몸, 파랗고 긴 꽁지가 조금씩 보였다. 

우거진 가지들을 들치며 몇 걸음 들어서자 그 녀석은 재빨리 몸을 숨겨 버렸다. 더 들어가 보려고 했으나 목책이 가로막고 있었다. 뛰어넘을 만한 곳을 찾아 목책을 따라 내려가다가 움칠하며 멈추어 섰다. 어떤 여자 하나가 눈앞에 불쑥 나타나 있었다. 그녀는 목책에 기대어 서서 휴대전화기 속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그 녀석을 잡으셨나보죠?”
"네에?"
"사진 말이에요. 지금 찍은 거죠?" 
"… 아아! 네에, 어떻게 우연히 잡혔네요."

그것이 그들의 첫 대화였다. 
며칠 뒤 그는 또 꿩의 소리를 듣고 폭포 뒤로 찾아갔으나 모습을 보는 데는 실패했다. 그 대신, 돌아오는 길에 호숫가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휴대전화의 전송으로 꿩의 사진을 얻었다. 사진은 그날 밤 인쇄되어 책상 앞에 붙여졌다. 

그 뒤로 그녀를 마주치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나중에는 서로 시간을 맞춰 산책을 나가게 되었다. 
여름날이었다. 호숫가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벤치에서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등 뒤쪽 멀지 않은 곳에서 기차 소리가 들려 왔다. 그들의 화제는 여행으로 옮겨갔다.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함께 여행 동호회에 들어갔다. 그리고 가을과 겨울 내내 주말마다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즐겁고도 힘든 단체 나들이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친구에서 연인을 넘어 남들이 얼핏 보고는 부부인 줄 알 만큼 한없이 가까워져 갔다. 
해가 바뀌고 다시 봄이 돌아왔다. 처음 만난 지 대략 일 년이 되었을 무렵, 그들은 오랜 만에 꿩을 보러 공원으로 갔다. 

더 없이 따스하고도 아름다운 봄날이었다. 나무 위에서는 까치들이, 땅에서는 비둘기들이, 폭포 아래 연못에서는 오리 한 쌍이, 그리고 숲에서는 옛날의 그 꿩이 밝은 울음소리로 그들을 환영했다. 
폭포 뒤쪽 숲으로 가는 계단에는 아카시아 꽃잎들이 눈처럼 하얗게 덮여 있었다. 그들은 우거진 나뭇가지들 밑으로 기어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큰 바위 앞에 딱 두 사람이 앉을 만큼의 풀밭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앉아 바위에 기댄 채 꿩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꿩이 그들 앞에 전신을 드러냈다. 그들은 오래도록 꿩을 바라보며 그곳에 머물렀다.
"동호회를 그만두면 좋겠어요."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되던 무렵, 그녀가 불쑥 꺼낸 말이었다.
"아니, 왜요?"
"사람들과 멀리까지 다니는 게 힘도 들고 번거로워서요." 
"그래도 재미는 있잖아요?"
"이젠 좀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어요. 예전처럼 공원에 산책이나 가면서요."
"심심하게 어떻게 산책이나 하고 있어요, 여행 마니아가?"
"뭐가 심심해요? 예전에 얼마나 좋았었는데?"
"그땐 서로 잘 몰랐으니까 그랬고, 이제는..."
"이제는 너무 알아서 우리끼리는 재미가 없다는 말예요?"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다니는 게 단조롭지도 않고 더 좋다는 말이지요."
"같은 말이잖아요?"

그 날 논쟁은 거기서 그쳤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 번 지방나들이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한 편 놀라면서도 다음 주에는 그녀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똑같은 일이 다음 주에도 이어졌으나 한 번을 더 기다려 보았다.
"두 분이 부부싸움을 크게 하셨나 봅니다."

사람들은 농담으로 그렇게 말했다. 결혼을 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부부싸움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안 나왔어요? 말도 없이."
"말했잖아요? 먼 여행은 안 다니겠다고."
"그러지 말고 다음엔 꼭 나와요. 나 혼자 다니려니 재미가 없어요. 남들도 뭐라고 하고."
"남들이 뭐라고 하길래요?"
"부부 싸움을 했느냐고 하지요. 다음에 또 혼자 가면 아마 이혼했느냐고 할 거예요."
"그렇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면 더 나갈 수가 없죠. 결혼도 안하고서..."

그녀는 완강했다. 똑같은 대화가 몇 번을 반복되어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여름이 무르익어가던 어느 날, 마침내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다시 만날 약속 없이 헤어졌다.
그때쯤, 그는 갑자기 전셋집이 팔려 이사를 가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와 다투느라고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마침 연구실 일이 너무 바빠져 집을 얻으러 다닐 틈도 별로 없었다. 게다가 전세난 속에 여름철 비수기마저 겹쳐 빈 집을 찾지 못했다. 다행히 짐이 많지 않아 친척 집에 임시로 맡겨 놓고 가을이 오기를 기다리며 친구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런 사정을 전화로 알려줄까 생각해 보기도 했었지만, 서로 다투고 만나지 않던 중이어서 불쑥 전화를 걸어 주소도 모르는 채 이사를 간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만나면 이야기를 해야지."

그냥 그렇게 생각하며 여러 날이 흘러갔다. 

한 편으로는 그녀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화가 오면 한 번 더 동호회 얘기를 꺼내 본 뒤, 그녀가 굽히지 않으면 자신이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칠월 초순이었다. 조금 더 있으면 휴가철이 시작되는데 그 때까지 내버려두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져 줘야지. 동호회를 그만두었다고 말하면 다 해결될 거야. 그리고 가을에 결혼하자고 해야겠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받지 않았고 기다려도 답이 없었다.
"이거 큰일 났군.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야. 너무 오래 연락을 안 해서 그런가 봐."

그래서 처음으로 그녀의 직장에 전화를 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여자중학교의 처녀 선생님에게 남자가 전화를 거는 것을 그동안에는 금기로 여겨 왔지만 이제는 그것을 깰 수밖에 없게 되었다.
"윤세영 선생님 계신가요?"
"그만두셨는데요. 얼마 전에 사직하셨습니다."
"네에? 사직이라니요? 왜요? 아프신가요?"
"집안일 때문이라고 하시던데요. 아마 결혼이나 이민 같은 일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수긍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집에도 찾아가 보았으나 이미 이사를 간 뒤였고,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동회에는 주소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결혼을 한 게 맞나 보군. 동호회도 그래서 그만두겠다던 거였어. 전화도 그래서 안 받았고."
서운함과 후회가 그리움과 함께 한꺼번에 몰려들었으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4.

"철이 없었지."
폭포 앞에 앉아 옛일을 생각하며 씁쓸하게 웃어 본다. 그녀의 소식이 문득 몹시 궁금하다. 궁금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매우 보고 싶다. 그러나 그녀를 찾아볼 길이 없다. 

작년에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바꾼 것이 큰 후회로 떠오른다. 혹시 그녀가 무슨 소식을 전하고 싶어도 연락을 해올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물론 연구실에 물어보면 알 수가 있겠지만, 그녀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여자였다. 게다가 결혼까지 한 몸이니!
"잘 살고 있겠지. 좋은 여자니까. 그때 결혼을 했으면 벌써 아기 엄마가 되고도 일 년은 되었겠어."

아기를 안고 있을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러나 구체적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사진에서 본 아기엄마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아기엄마들은 언제나 아름답더군."

아침에 통화를 했던 아기 엄마가 생각난다. 아기 대신에 미안하다고 말하던 엄마의 목소리는 행복에 넘치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을 거야."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낸다. 뚜껑을 열고 바로 버튼을 눌러 본다. 신호가 가기 시작한다. 그는 가슴을 두근거리며 응답을 기다린다.
"여보세요."

아침의 그 목소리가 아니다. 
"역시 꿈이었나 봐."

실망이 몰려든다. 
"아, 저, 아기 엄마 휴대전화기가... 아닌가요?"
"아기 엄마요? ... 누구신데요? 왜 그러시죠?"
"네, 아침에 전화를 받았었는데요..."

그는 아침의 꿈같은 사건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잠깐 기다리세요."

이 말로써 그의 이야기는 중단된다. 그리고는 두꺼운 적막이 전화기를 덮어버린다. 온 세상의 전기가 나간 듯 일순간에 어둠이 휘몰아친다. 그는 숨을 멈추고 기다린다. 
전화기에 다시 소리가 잡히고 있다. 정지돼 있던 엔진이 갑자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처럼 가슴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낀다. 
"세영아, 받아 봐. 남자 전화야. 아는 사람인가본데... 서윤아, 넌 이리 온, 엄마 전화 받게."

그의 가슴이 쿵쿵 뛰는 소리가 들린다.
"여보세요! 세영씨!"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그녀를 부른다. 귀에 전화기를 미처 대기도 전에, 그녀의 이름이 그녀의 방안과 공원의 폭포를 동시에 흔들어댄다. 폭포보다 더 시원한 소리로 아기가 웃음을 터트린다. 바로 그의 귀에 대고 웃고 있는 것처럼 가깝게 들려온다. 

폭포 뒤 숲속에서는 꽁지가 파란 꿩 한 마리가 큰 바위에 올라서서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떨어지는 하늘을 쳐다보며 쿠우쿡 웃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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