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산사에 아기 부처님
[수필] 산사에 아기 부처님
  • 성광일보
  • 승인 2022.02.11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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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순
/수필가, 성동문인협회 명예회장
임길순

한해가 마무리되는 12월이면 절을 찾는다. 가족이 동행하여 이삼 일간 머무는 산사의 하루하루는 극락세계 그 자체이다. 해마다 같은 절을 찾는 것은 아니다. '올해는 어느 절로 갈까'를 생각하는 것도 즐거움이다. 산과 절을 정한 후 전화를 걸어 스님께 양해를 구한다. 핑계는 새해를 맞이하는 기도라고 하지만 그것보다는 산사에 울려 퍼지는 목탁 소리, 새벽의 종소리, 절에서만 맛볼 수 있는 정갈한 공양을 먹으면서 몸과 마음을 쉬는 것에 더 관심이 있다.

스님과 전화 통화를 할 때 빼놓지 않는 것이 있다. 개구쟁이 어린아이가 있어서 시끄러우니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체와 멀리 떨어진 구석진 방을 부탁한다. 그러면 스님들은 “아기부처님이 뛰어다니겠군요"라고 기분 좋아지는 답을 준다.

아이가 돌을 막 넘긴 그해 지리산 월정사로 갔었다. 오대산 산중에서의 눈은 백색의 꽃밭이었다. 색이 있는 것이라고는 스님들이 입고 다니는 승복이 눈부실 정도로 화려한 색이었다. 하얀 눈 위에 흰 고무신으로 걷는 스님의 걸음걸이 마져 눈으로 덧칠한다.

절에서 머무는 며칠만이라도 자연의 호흡과 스님들의 시간에 나를 맞추기 위해서 노력한다. 겨울의 중심인 절기에 새벽 3시면 어김없이 도량석을 하는 스님의 목탁 소리가 들린다. 처음에는 꿈결처럼 작게 이어지다가 점점 커지는 목탁 소리에 나도 산속에 더불어 사는 우주 만물의 하나가 되어 잠을 깬다.

내가 새벽예불에 참석하기 위해 방을 나서면 남편은 잠자는 아이를 본다. 그날도 그랬다. 도량에 켜놓은 석등이 어슴프레 밝히는 빛을 따라 대웅전으로 향할 때의 정적에 차가운 공기가 함께 동거하니 너무나 고요해서 상쾌하다. 법당문을 열면 큰스님을 중앙으로 하여 많은 스님이 가사 장삼을 입고 법당의 냉기보다 더 살벌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새벽 쇳송 소리를 듣는다. 쇳송 소리가 얼마나 맑고 청량한지 소리에 빠져 아무런 상념도 일어나지 않는다.

쇳송이 끝나고 예불이 시작될 쯤 남편이 법당문을 빼꼼히 열고 빨리 나오라고 급한 눈짓을 했다. 아이가 잠을 깻구나 싶어 조심스레 법당을 나왔다. 남편은 아기가 잠에서 깨어 엄마를 찾느라 고래고래 악을 쓰며 울어서 달랠 재간이 없다고 한다. 우는 아이를 방에 혼자 두고 나를 찾아온 남편에게 화를 내며 황급히 뛰어 방으로 뛰었다. 

우리는 방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얼굴을 마주 보고 나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았다.
행자님 두 분이 아기를 가운데 놓고 온갖 재롱잔치를 하고 있었다. 행자님 한 분은 목탁을 치며 동요를 부르고 또 다른 행자님은 요령을 흔들며 아이를 달래는 모습이란. 우리 아기도 숱을 많게 한다고 머리를 스님처럼 깎아 놓았었다. 우리를 본 행자님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목탁과 요령을 챙겨 들고 방을 나갔다. 아기는 울음을 그치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우리도 아이처럼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아침 공양 시간에 주지 스님은 “내일 새벽기도 시간에는 보살님은 아기보고 처사님이 법당 가세요." 새벽 소란 때문에 빚어진 결과였다. 남편은 풀이 죽었다. 법당에서 두 시간 동안 기도할 신심이 없다면서 걱정했다. 차라리 밤사이에 눈이나 많이 내려 눈 쓰는 울력이나 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기도는 이루어졌다. 도량석 소리가 나자 주지 스님이 방문 앞에서 “처사님, 오늘 아침기도는 눈 쓰는 울력입니다." 문을 열어보니 눈이 어찌나 많이 내렸는지 마루 끝까지 하얗게 쌓였다. 남편은 스님이 건네주는 가래로 신나서 눈을 밀었다. 가래로 밀고 비로 쓸어놓은 길이 터널 같았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도량 전체를 쓸었다. 비로 쓰는 것보다는 눈을 동그랗게 굴려 뭉치는  게 쉽다고 여겼는지 스님들이 눈 뭉치를 굴리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신도들의 장난꾸러기들이 몰려나왔다. 아이들은 스님과 함께 어우러져 눈을 굴려 눈사람을 만드느라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남편과 아이도 눈사람을 만들었다. 아기 부처님 같은 눈사람을 만들어 도량에 세우는 것만으로 아이들에게는 신나는 놀잇감이었다. 새벽에 아이에게 동요를 불러주었던 행자님들도 함께 했다.

며칠을 낮에는 장작불 지핀 따끈따끈한 방에서 아이와 뒹글기도 하고 실컷 눈 구경을 하면서 보냈다. 눈 때문에 길이 막혀 산문 밖을 나갈 수 없는 것도 즐거움이다.
우리는 해마다 이렇게 맑고 따뜻한 추억을 만들어 절을 내려온다. 산사에서 며칠의 생활은 일 년을 보내는 데 많은 힘이 된다. 하루하루를 생활하다 마음이 고요하지 못하고 산란할 때면 절에서의 상쾌한 기억으로 나를 다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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