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에세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 성광일보
  • 승인 2022.02.14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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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효은/작가, 기자
어효은

좋아하는 무언가가 가까이에 있다는 건 큰 복이다. 좋아하는 무언가가 멀리 있어도 괜찮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 빛을 본 지 1년이 될 무렵, 강원도 바다 마을로 이사를 왔다. 부모님 두 분 모두 강원도 사람이지만 일을 하기 위해 부산에서 생활했다. 부산에서 오빠가 태어났다. 3년 뒤 엄마는 나를 갖게 되었는데 아이를 낳을 때가 다되어서 쌍둥이인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 하나 키우기도 쉽지가 않은데 3살 남자아이에, 갓난아기 둘까지 맞벌이를 하면서 키우는 것은 천하장사도 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 같다. 이웃 할머니에게 언니와 나를 맡기고 일을 나갔다가 돌아와서 엄마는 경악하고 말았다. 연세가 많은 이웃 할머니는 눈이 침침하였는지 아기의 코에 젖병을 들이댄 채 졸고 있었고 그 장면을 목격하고 만 것이다. 친할머니, 할아버지도 연세가 있지만, 집도 있었고 아이들을 좀 더 마음 놓고 맡길 수 있지 않을까 하여 강원도에서 생활하기로 마음을 굳히신 듯하다. 

할아버지는 나를, 할머니는 언니를 담당했다. 어렴풋이 할아버지가 머리를 따주던 기억이 난다. 언니와 다퉈서 울고 있으면 말없이 손에 오백 원을 쥐여주시곤 하셨다. 한 번도 우리에게 성을 낸 기억이 없다. 말수가 워낙 적으셨다. 기침을 많이 하셨고 소파에서 신문을 보면서 낮잠을 주무시던 모습이 기억난다. 할머니는 말수가 많고 생활력이 강했다. 말썽을 부리면 빗자루 매질을 해서 맨발로 옆집까지 달아난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도 인정이 많아 옥수수나 고사리를 팔 때 넉넉하게 넣어 파셨고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늘 우리 먼저 먹이곤 했다. 기쁜 일이 있으면 환하게 웃고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화를 내고 감정 표현도 풍부했다. 엄마, 아빠도 닮았지만 어릴 때 키워주신 할머니, 할아버지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다. 두 분 모두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두 분의 성향이 골고루 내게 남아있다는 걸 느낀다.

언니와 나는 어릴 때부터 하루가 멀다 하고 바닷가에 가서 놀았다. 햇볕이 만들어준 주근깨가 지금까지 남아있다. 어릴 때는 뽀얗고 하얀 피부를 부러워했는데 주근깨투성이인 빨간머리앤을 알고 난 뒤로 괜찮아졌다. 긍정적인 빨간머리앤 덕분에 삶을 더 가볍고 재미나게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물놀이하고 놀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서쪽에는 멋진 산맥이, 동쪽에는 푸른 바다를 볼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다. 어른이 된 지금 대가 없이 받았던 자연의 사랑에 감사하다. 자연은 말없이 마음을 위로해준다. 먹고 살기 바빠 부모님은 자주 다투셨다. 불안과 두려움을 안은 채 바다에 가서 시원하게 펼쳐진 파란 바다를 보면 마음이 풀어지곤 했다. 

성인이 되어 도시 생활을 할 때도 한 달에 한 번은 꼭 바다를 보러 가곤 했다. 늘 멀리 있는 바다를 그리워했다. 한 달 이상 바다를 보지 않으면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1년간 타지방생활과 5년간의 서울 생활을 마치고 나는 다시 강원도에 왔다. 

바다는 나의 고민, 꿈, 사랑 이야기를 모두 알고 있다. 좋아하는 무언가가 가까이에 있다는 건 큰 복이다. 좋아하는 무언가가 멀리 있어도 괜찮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바다를 매일, 또 마음껏 볼 수 있다. 도시 생활을 할 때 바다는 멀리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바다를 보러왔을 때의 느낌이 생생하다. 매일 볼 수는 없었지만, 마음속에 파도 소리, 바다 내음새, 출렁이는 바다의 모습, 드넓게 펼쳐진 푸른 바다를 그릴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멀리 있을 때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만나지 못하는 동안 불안과 걱정 대신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을 알기에 그것을 그리며 잔잔하게 미소 지을 수 있는 것. 그 존재의 소중함을 더 크게 느끼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쩌면 바다를 그리는 일과 같은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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