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회고의 거리, 종로를 걷다
[수필] 회고의 거리, 종로를 걷다
  • 성광일보
  • 승인 2022.02.14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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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춘윤

버스정류장 앞 약국, 자동 유리문이 열렸다. 그 틈새로'서걱' 소리를 내며 누렇게 빛바랜 플라타너스 잎 하나가 들어왔다. 바람이 가로수를 흔들다가 바닥을 휩쓸며 지나가고 있다.
종로5가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로  돌아간  듯  거리의 사람들도 상점도 길가에 늘어놓은 옷가지조차도 과거의 한 시점에서 정지되어 있다. 시장은 쇠락한 노신사처럼 한때의 화려했던 상념들을 내려놓았다. 골목 안 간판은 덕지덕지 검버섯으로 얼룩져 있고, 새로 단장한 상점들은 야한 화장을 덧칠한 여자들처럼 군데군데 속내가 드러나며 어색했다. 바람도 불협화음을 내며 지나가는 거리가 을씨년스러웠다.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거리. 언젠가 나도 시간을 거부하며 옹고집처럼 버틴 이곳에서 퇴색된 추억만을 붙들다가 서서히 사라지는 건 아닐까! 매일 마주치는 거리 풍경은 언제나 생경했다.

아침  아홉 시경이면 출근길로 부산한 다른 곳과는 달리 종로5가는 갓 빗질한 마당 같다. 그 텅 빈 길 위로 일상이 시작된다. 내가 근무하는 약국 옆 가게는 유행이 지난 트로트곡이 하루 종일 시끌벅적한 만물상이다. 이른 아침부터 요란한 트로트곡이 텅 빈 길바닥 위로 쏟아져 나오면 황당한 기분이 들곤 했다. 마치 시골 장터로 출근하는 것같아 잰걸음으로  쫓기듯  지나갔다.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더 소란스럽고 빨라진 메들리 소리가 약국으로 쏜살같이 뛰어 들어가게 했다.

열 시가 넘어 햇살이 퍼지면 종로거리는 기지개를 켜듯 거리가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약국 유리문 밖은 한 편의 영화처럼 기묘한 출연자들로 시시각각 변했다. 백구두에 백색 정장, 노랑 구두에 노랑색 정장은 물론 빨강, 연두색으로 요일마다 화려한 원색으로 변신하는 할아버지가 같은 시간이면 어김없이 지나갔다. 바바리코트에 중절모와 체크스카프로 <카사브랑카>의 험프리 보가트처럼 멋을 낸 노신사, 하얗게 세월 앉은 머리를 반짝이는 비즈핀으로 화려하게 꾸미고 치렁치렁한 치맛단에도 무대의상처럼 비즈를 박은 할머니, 주름진 눈매와 무너진 턱선을 잡아 끌어올리듯 높게 올린 헵번 머리에 진한 입술의 중년여인이 지나갔다.  

여인의 아슬아슬한 킬힐이 아침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사라졌다. 고정출연자인 그들이 한 시대가 사라져 갈 것을 예고하듯 스쳐 지나갔다.
점심때가 다가오면 공기가 살짝 들뜨면서 지하철과 버스가 사람들을 토해냈다. 인생의 정상을 이미 올라갔다 내려온 초로의 등산복 차림의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다. 거리의 패션은 아침 나름의 격식을 차린 옷차림과는 달리 무채색 등산복에 백팩을 맨 사람들이 주류를 이뤘다.

지난 시절들의 흑백사진을 떠올리게 하는, 여전히 세련되지 않은 거리풍경이 몸과 마음을 무장해제시키고 있다. 물건을 사고파는 것도 관망하는 듯, 달뜬 공기를 느긋하게  즐기는  이들로  포만감이  느껴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오랜 세월로 고칠 수도 찾을 수도 없는 물건들은 뒷골목 사이사이에 빛바랜 추억을 끌어안고 쌓여 있다. 익숙하다 못해 무심해진 것들로 길에 좌판이 깔리고, 용도를 잃고 갈 곳마저 잃어 바닥에 내놓은 물건들, 기웃거리는  백발  희끗한  사람들의  사이로  시간이  내몰렸다.

그 틈새로 새벽장 나선 지방 상인들이 커다란 백을 메고 삶의 무게로짓눌린 어깨로 쫓기듯 걸어가는 걸음이 숨찼다.
햇살이 아래로 내려앉는 오후가 되면 거리는 다시 새로운 풍경으로 바뀌었다. 크고 낡은 라디오를 든 반백의 검정고무신 남자가 정류장앞에서 독백을 하듯 마이클 잭슨 춤을 추었다. 길 한가운데서는 거친 세월에 초점을 잃어버린 할머니가 한서린 목소리로 가녀린 몸을 떨며 사람들을 향해 외치고 또 외쳤다. 비명 같기도 하고 탄식 같기도 한 소리에 무표정한 군중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무심하게 그녀의 외로움을 밟고 지나갔다. 어느덧 춤추던 남자도 할머니도 군중에 떠밀리듯 사라졌다. 유리문 밖을 바라보던 내게 알 수 없는 슬픔이 한숨처럼스쳐가는 오후였다.
어스름이 빌딩 사이로 스며들기 시작하면 시간을 비집고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밤은 골목길 포장마차 언저리에서 기억을 불러내었다.  그리고는  추억을  토해냈다. 그들이  청년이었을  때,  종로를누비며 세상을 향해 외쳤던 수많은 구호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걸까!

한때 온 거리를 어깨동무하며 항거하던 군중도, 가슴을 뛰게 했던 함성도, 그들의 청춘도 부서지다 못해 닳아 버린 보도블록으로 스며들었다. 가끔은 옛 동지들과 지난 시절을 합창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그렇게 종로의 밤이 희끗해진 머리카락 사이로 깊어 갔다.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종로5가, 엄밀히 말하자면 종로5가에서 신설동까지의 길은 이렇게지나간 것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회고의 거리다. 낡은 사진 속 풍경처럼 시간이 머물고 그 사이로 헛헛하고 회한이 뒤섞인 공기가 떠다녔다. 어느덧 시작보다는 돌아보는 시간이 긴 사람들을 바라보니 편안해지고  쫓기지 않는 여유로움이 생각을  느리게 했다. 이 거리에서는시간도 길을 잃고 방황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이 거리가 편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복잡하거나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 마치 추억의 영화 세트장 같은 거리에서나도 종종 관객 A, 관객 B가 되어 걸었다. 그러면 내가 붙들고 놓지못했던 것들의 허상이 보여 마음이 가라앉고 막연하게 움켜쥔 집착이 분해되며 몸이 가벼워졌다. 숨가쁘게 쫓아갔던 사랑도 명예도 하다못해 상실감 같은 감정들조차 의미가 희석되어 갔다. 인생의 승자도 패자도, 가진 자도 못 가진 자도 경계선이 없어지고 서로 닮아가고 있다. 나도 점점 물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지난 세월의 궤적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 이상한 거리에서는 결핍도 부끄럽지 않았다. 모두가 탁발승이 된 듯 텅 빈 마음을 내어놓으면 이것저것 담겨져 허기를 면했다. 지나간 시대가 귀퉁이에 모여앉아 수다를 떨었다. 그 곁을 또 다른 시대가 얼룩진 옷자락을 날리며 지나간다. 주인공도 구경꾼도 머물지 않으나 오랜 잔상으로 남겨지는 거리.
나도 가끔씩 구경꾼이 되어 그들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되면 고정 출연자인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보라색 양복에 보라색 구두를 신고 보라색 코트를 걸치고 이 거리를 걸어갈 것이다. 그러면 또 다음 출연자를 기다리며 나는 시계를 보고 있을 것이다.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이, 익숙한 것들을 그리며.

안춘윤

안춘윤
- 이화여자대학교 미술 대 동양화과, 대학원 미술교육석사 졸업
- 개인전 및 아트페어 32회 기타  여러 전시 다수 입상 및 표지그림 선정
- 그룹전 및 해외전 540여 회
- 현재 광진예술회관, 건대롯데 문화센터 채색화 사군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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