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제2의 고향
[수필] 제2의 고향
  • 성광일보
  • 승인 2022.02.2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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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녀/수필가

[수필] 제2의 고향

김선녀
- 2018년 광진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광진문협  사무차장

이른 새벽 목포항에 있다. 배표를 사고 항구 근처 밥집을 찾아들었다. 어젯밤 막차를 타고 내려왔다. 열차에서 자다 깨다 하며  내려온 탓에 온몸이 뻐근했다. 서울살이에 익숙한 나는 바다 비린내에 속이 울렁거렸다. 귀밑에 붙인 파스도 제 기능을 못하는 것 같았다. 국밥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남편과 달리 나는 밥술을 뜨지 못했다.

산등선이 울타리 같은 산골 마을에서 나고 자란 내게 바다는 미지의 세계 같은 환상이 있었다. 처음 남편을 만나던 시절, 남해 홍도, 흑산도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듣도 보도 못한 섬마을이 고향이라고 했을 때부터 호감이 생긴 것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정말 그래서였을까. 남편이 들려주는 섬마을 이야기를 동화처럼 듣다가 그 동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어린 나이에 덜컥 시집을 갔다.

열차에서 내리면서부터 남편은 코를 킁킁거렸다. 밤새 들떴던 마음이 지쳐가는 나와는 달리 생기가 도는 남편에게 목포는 고향집 마당같은 곳인 모양이었다. 역 광장을 벗어나 익숙한 길을 걸으며 남편은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아졌다.

우리는 다시 항구 여객터미널로 돌아왔다. 아까보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아졌다. 그래도 배가 뜨려면 아직도 멀었다.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보낼까 궁리하다가 가까운 재래시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팔딱거리는 고기들이 시장 바닥을 질펀하게  만들었다. 비린내에 사색이  되어가는 나와 달리 신이 난 남편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가 결국에는 토하고 말았다. 백지장이 된 얼굴을 보고 남편은 급히 약국을 찾았다.

배에 오르자 남편은 멀미로 고생한다며 선실로 들어가 억지로라도 눈을 붙여 보라 권하고, 나는 뱃머리 갑판으로 올라가 타이타닉호 연인들의 낭만을 재현해 보고 싶어 했다. 마지못해 갑판에 오른 남편은 백지장인 나를 살피고, 약 효과가 나타난 것인지 견딜 만했다. 여객선을 타본 적이 별로 없는 내가 아주 먼 바다 섬까지 가는 것이다. 남편은 자기 때문에 출세한 거라며 우쭐거렸다. 낭만도 파도로 인한 멀미를 달래지 못했다. 결국엔 선실로 돌아와 나는 잠이 들었고, 남편이 다 왔다고 깨워 눈을 떠 보니 멀리 선착장이 보였다.

나는 가라앉지 않은 속을 감추며 마중 나온 시아버지께 최대한 밝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농번기라 들에서 일하다 말고 경운기를 몰고 나오 셨을 아버님, 경운기 뒤에 아들과 며느리를 태우고 마을로 향하던 아버님은 꼭 슈퍼마켓에 들렀다. “뭐 사다 줄까? 서울 아가!”하고는 대답도 듣기 전에 가게로 들어가셨다. 잠시 뒤 한 손에는 소보루빵, 다른 한 손에는 콜라병이 들려 있었다.
섬에 익숙지 않은 나는 전에도 섬에 있는 동안 끼니를 제대로 먹지 못했다. 온갖 생선 반찬뿐인 밥상에 내 반찬으로 푸성귀를 올렸지만, 그것에서도 비린내가 나서 먹는 둥 마는 둥하다 수저를 놓곤 했다. 시어른들 눈치챌까 싶어 뒤란으로 가서 끄억끄억 속앓이를 하는 나의 사정을 알고 계셨다.

우물가에서 김칫거리를 손질하던 어머니도 경운기 소리에 돌담 너머 올라오는 우리를 바라보고  계셨다. 육남매가 태어나고 자란 마당은 어느 작은 분교 운동장 같았다. 시장하겠다며 밥상 위엔 온갖 생선 요리로 가득했다. 나는 겨우 가라앉은 속이 다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서울 아가는 나온나!”하고 시아버지가 부르셨다. 빵봉지와 콜라를 건네며 여기서 이것 먹고 있으라 하시고는 방으로 들어가셨다. 난 툇마루에 걸터앉아 담장 너머 먼 곳을 바라보았다.
여객선을 타고 섬마을 시댁에 오기 전, 나는 바다에 대한 낭만이 있었다. 앞마당에 서면 저 멀리 바다가 보이는 집,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드넓은 들판이었고, 아주 멀리 높지 않은 산등선이 희미할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시아버지는 우리를 앞세우고 집 뒤 잔등길로 들어섰다. 낚시를 좋아하는 아들과 섬 생활에 익숙지 않은 며느리에게 낚시의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다. 한동안 쓰지 않던 낚시 도구를 꺼내 손질해 두고, 어머니가 싸 주신 초장과 회칼을 챙겨 들었다. 과일도 두어 개 넣어 주셨다. 우리 부부는 내려오면서부터 농사일을 거들 생각이었는데 아버지의 제안에 못 이기는 척 바다낚시에 나섰다. 나는 어머니를 도와 밭일을 하겠다며 호밋자루를 들었다. 남편이 다가와 호미를 빼앗아 툇마루 끝에 놓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잔등 오솔길을 걷는 동안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아버지는 저만치 앞서가시고 우리는 따라가기 바빴다. 산등선에서 내려다보이는 바다, 그 넓은 바다 위에 큰 점, 여객선이 물살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검은 바위 절벽을 시아버지는 익숙하게 내려가시며 연방 “서울 아가, 조심해라”하고 외치셨다.

그리고 “아가, 이거 꼭 잡고 있어. 고기가 물면 손에 진동이 느껴질거야”하고 내 손에 낚싯대 하나를 쥐어 주셨다. 남편은 빈 낚싯대를 던졌다가 끌어올리며 몇 번이고 시연을 해 보였다.
한참이 지났다. 시아버지는 두 마리나 잡으셨는데 우리 낚싯대는 감감했다. 우리는 낚싯대를 내려놓고 아버지가 손짓하는 넓적한 바위로 모였다. 벌써 두 사람은 도다리와 장어회를 초장에 찍어 먹었다. 나는 과일을 깎았다. 나를 쳐다보던 시아버지는 “서울 아가는 이 맛을 몰라서 참 안 됐다”하시며 다시 한 번 입맛을 다셨다.

반나절 바다의 바람이 몸에 배었는지 비린내로 울렁이던 속앓이도 잊었다. 어둠이 내려서야 마당에 들어섰다. 낚시 장비를 정리하고 우물가에서  씻기 시작할 때 시어머니는 어둠을  등에 달고 돌아오셨다.

급히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 일손을 거들며 말을 건넸다.
다음 날 새벽 밭에 나가 고춧대를 세우는 시아버지를  도와드렸다.
이웃 어른들이 “서울 아가가 예쁘구먼”하는 말에 대답 없이 웃으시는 얼굴에 행복이 가득했다.
사나흘을 보내고 다시 경운기를 타고 선착장으로 나오던 날, 어머니도 말없이 경운기에 올라타셨다. 며느리 손에 소보루빵과 우유를 들려주시는 어머니 얼굴엔 서운함이 가득했다.
시부모님과 며느리로 엮인 그 세월이 고스란히 추억으로 떠오른다. 바다, 그 알 수 없는 깊이와 넓이만큼 깊고 넓은 두 분의 품이 정말 그립기만 하다. 그 세월이 너무나도 선명한데, 벌써 삼십 년 전 일이라니!

바다에 서면 습관처럼 목이 메어 온다. 평생 뱃사람으로 살아오신 시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이야기와 시어머니의 고단함. 그리고 서울 아가와 함께한 추억들이 갈무리되어 노을이 된다. 내 황혼에 노을로 내려 외롭지 않은데, 아주 가끔 그리움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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