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산실
[수필] 산실
  • 성광일보
  • 승인 2022.03.1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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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순

체증을 앓는 것처럼 답답했다. 이 집을 살 때보다 여섯 배 정도 올랐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  생긴  증세다.  부동산  중개업소를  기웃거렸다. 하지만 세금을 내고 내가 원하는 평수로 가려면 경기도 쪽만 가능했다. 서울에 생활권이 있고, 집을 옮긴다면 딸네 집으로 출퇴근하는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십오 년 전 이 집으로 이사 오면서 작은 방은 딸 취향대로, 주방과 큰방은 내가 원하는 대로 수리를 했었다. 끌고 다니던 짐을 정리하면 서 심플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18평 공간에도 뭐든 들여오면 요술처럼 제자리를 잡았다.

이사를 갈지 말지 넉 달 이상 고민에 빠졌다. 부동산에서는 그냥사는 것이 좋겠다고 권했다. 그래서 내린 처방이 집 구조 변경이었다.
함께 고민하던 딸은 “후회 안 할 거지?”하고 몇 번이나 회유했다.
“살던 집 인테리어 바꾸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지?”
“이제 엄마도 큰 집에서 살아 봐야지.”
“이 동네 지겹지도 않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지.”

하지만 나는 살림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원래 나의 버킷리스트 1순위는 여행이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여건을 만들어 떠나곤 했다. 한번의 여행은 세 번의 즐거움을 준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지금의 1순위는 집 구조를 바꾸는 것으로 바뀌어 갑자기 마음이 급해졌다. 수묵화 그리는 작업대도 갖고 싶고, 답답하기만 한 체증 치료도 필요했다.
딸이 출가하고 갈수록 살림이 늘었다. 철따라  정리를 해도 사연이있어서 아까워서 다시 넣어 둔  것도 많았다. 베란다부터 정리했다.

100리터짜리 쓰레기봉투 숫자가 늘어나는 만큼 피로도 쌓여 갔다.
짐 정리 사흘 만에 허리 통증과 빈혈 증세로 링거를 맞았다. 딸네집에 출근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안 하고 이틀을 쉰 다음 인테리어업자를 수배했다. 세 군데에서 견적을 받았다. “아는 놈이 도둑놈”이라는 말을 실감하면서 내가 직접 뛰기로 했다. 이삿짐센터, 도배, 페인트, 싱크대, 가구업체를 따로따로 섭외했다. 바닥을 교체하는 대신 입
주 청소업체를 불렀다. 그리고 나는 열흘간 짐 정리한 대가로 한의원을 들락거렸다.

인테리어업자들은 공사 기간을 보름 이상 잡았으나 내 계산은 달랐다. 나가는 이사와 가구 철거 하루, 페인트 하루, 도배 하루, 싱크대와 주문가구 설치, 입주 청소 하루, 그리고 들어오는 이사 하루였다. 업자들도 오케이했다. 오래전 부산에서 이층집을 지어 보았고, 이 집으로 들어올 때 전체 수리한 경험이 있어 일은 겁나지 않았다.

에어컨, 공기청정기, 전등을 주문하고 전기공사에 또 하루를 잡혔다. 도배가 끝나고 천장을 보니 울퉁불퉁 엉망이었다. 풀이 마르기 전이어서 그런가 하고 도배비를 송금했다. 그리고 다른 일이 바빠서 잊고 있다가 얼마 후 천장을 보니 엉망이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다.

지인이 초배지를 바르지 않아 그런 거라고 했다. 당장 도배업자를 불렀다. 그는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고 나는 썩소를 지으며 나를 만만하게 봤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쉽게 가려던 도배공 때문에 전등 교체와 전기공사가 미뤄지고 그는 하루 일당을 손해 보고 나는 여러 날짜를 손해 봤다. 그리고 주문가구 일정으로 또 미뤄지고 책장 사이즈가 맞지 않아 또 늦어지고. 들어올 이삿짐, 입주 청소작업이 다 뒤로 밀렸다. 결국 16일 만에 겨우입주를 마쳤다.

딸이 쓰던 작은방 방문과 책상, 책꽂이, 붙박이장을 드러내고 새로 책꽂이와 책상 두 개가 들어왔다. 긴 책상에는 컴퓨터와 프린터를 놓고 또 다른 책상은 작업대가 되었다. 녹색 깔판을 깔고 벼루와 붓걸이를 올려놓았다. 내가 갖고 싶었던 작업실이 그럴듯했다. 서재와 작업실이라고 부르기에는 낯간지러운 작은 방. 그러나 이곳은 지독한 산통도 사랑하게 될 나만의 산실청으로 거듭났다. 태어날 아이들이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창문을 열고 작업대에 앉았다. 창문 넘어 보이는 산책로와 한강변도 녹색이다. 어느 시인의 '유월의 사랑'처럼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모습으로 내 곁에 와 있다.

서정순

- 계간 《에세이스트》로 등단
- 제1회 광진문학 수필부문 신인상
- 광진문인협회, 느티나무문우회, 일현수필문학회 회원
- 수필집 《60, 내 생의 쉼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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