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슬픔을 사랑합니다
[수필] 슬픔을 사랑합니다
  • 성광일보
  • 승인 2022.07.13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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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길순/성동문인협회 명예회장
임길순

슬픔이 가슴에 내렸습니다. 슬픔은 나를 이기지 못하여 툭툭 내려앉더니 바람의 발목을 잡고 하소연합니다. 슬픔이 쏴아 쏴아 요동을 칩니다. 강화 너른 들녘으로 무엇이든 버리려 떠났습니다. 먼지 쌓인 거미줄을 닮은 그물이 있는 곳이 그리웠습니다. 내 슬픔이 먼지가 가득 쌓인 메마른 슬픔인 까닭입니다. 새벽녘 찬 이슬을 문 거미줄은 아직 아무런 먹잇감도 포획하지 못하여 성스럽기까지 합니다. 슬픔이 그런 슬픔이라면, 텅 빈 줄무늬 같은 아픔이라면, 온몸에 찬 이슬을 묻히며 몇 날 며칠이라도 터벅터벅 밤길을 맴돌겠습니다.

슬픔을 버리려 강화 바다에 갔다가 들녘을 만났습니다. 가을을 넘치도록 품고 있던 들에는 텅 빈 기다림만 남아있는 듯했습니다. 그들을 보면서 기다림의 숭고함을 알았습니다. 생을 풍성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텅 빈 기다림을 안다는 것이지요. 한 번도 비어 보지 못하고 채울 줄만 알았던 나는 빈 들녘, 땅속 저 깊은 곳에서 준비하는 생명의 울림이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추수가 끝난 들녘은 누군가 빗자루로 쓸어놓은 길처럼 많은 속내를 감추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길을 지나갔을까요. 들녘에도 한평생을 어여쁜 눈길로 쓰다듬은 그 진한 삶의 애환이 녹아 있었습니다.

슬픔이 발끝에서 철딱서니 없이 올라오더니 뜬금없이 강화도령이 임금으로 등극하기 전에 살았다는 철종 외가로 이끌었습니다. 조선 후기 치열한 왕위 쟁탈전을 놓고 싸우다가 당쟁에 희생된 철종이 자란 집에는 저를 닮은 슬픔으로 정적만 돌고 있었습니다. 

그 집 앞 텃밭에는 세상일에 달관한 듯한 노부부가 배추를 뽑고 있었습니다. 권력에 눈멀었던 이들이나, 그들에게 희생된 이들이나 모두 사라지고, 노부부만이 허리를 굽히고 배추를 어우르는 얼굴에는 잘 익은 가을보다 더 튼실한 미소가 있었습니다. 시골의 한가한 들녘에는 이미 거둔 사랑, 거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미소가 아름답습니다. 

조금 멀리 떨어진 밭에서 노부부를 닮아 보이는 배추 두 포기가 마주하고 있습니다. 정답습니다. 삐뚤빼뚤하여 속이 꽉 차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알이 차라고 남겨 둔 것은 아닐는지요. 찬 서리 맞으며 속을 키워내고 있을 배추. 한 포기만 덜그렁 있다면 슬픔을 놓지 못했을 겁니다. 둘이 마주 보기도 어려운 모양새를 하고도 나란히 밭을 지키는 그 모습 때문에 슬픔을 놓고 갑니다. 

소리 없는 사랑. 노부부가 굽어진 허리로 자식을 위해 배추를 뽑는 땅 밑에서 소곤소곤 읊조리는 생명 이야기, 찬 이슬을 머금은 거미줄 같은 코끝 찡한 사랑이 있어서 어느 날 문득 손님처럼 찾아오는 슬픔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생명이 묻어 있는 슬픔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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