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한여름 밤의 꿈(7)
[장편소설] 한여름 밤의 꿈(7)
  • 성광일보
  • 승인 2022.08.30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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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동
시인·소설가,
성동문인협회 이사
김욱동

그녀는 별 거슬리지 않을 정도의 하대를 하기 시작했다. 
잔잔한 수면 위 풀잠자리 날갯짓처럼 곱게 날아올 다음 말을 재촉하듯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서두를 일이 아니라는 듯, 한동안 마치 다음 이야기에 목말라하는 쪽의 관심을 증폭시키듯 몇 차례 헛챔질과 밑밥을 던지는, 짬짬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갑자기 어려워져 부모님들은 동생을 데리고 아버지 친가가 있는 강원도 정선으로 가고 나는 이모네 집이 있는 여길 오게 되었어."

말을 잠시 중단한 그녀는 야광 찌 깜박거림이 몇 차례 찌 올림 하다 비스듬히 수면 속에 사라지는 맨 오른쪽에 펼쳐두었던 3칸 반 낚싯대를 맵시 있게 챔질했다.
동시에 낚싯대는 물속으로 활처럼 휘어 처박히면서 그녀가 힘을 주며 대를 세우려 하자 끝대에서부터 금방이라도 줄이 끊어질 듯한 높은음의 피아노 줄 소리가 났다. 
고요하던 수면에 물보라가 일며 물고기의 바늘털이하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며 텀벙거리자 엉겁결에 그녀 곁으로 달려가 놓여있던 뜰채를 폈다.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수면을 주시하며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는 사이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능숙한 솜씨로 물속고기와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낚싯대를 펼쳐둔 물밑 수초대로 물고기가 머리를 돌려 방향을 잡자 그녀는 팽팽한 긴장감을 늦추고 여유를 가지려는 듯 오히려 그쪽으로 지그시 끄는 자세로 낚싯대를 한번 당겨주었다.

그러자 물고기는 부레를 통해 수심이 점점 얕아지는 것을 느꼈는지 얼른 방향을 바꾸어 이번에는 저수지 한가운데 수심이 깊은 반대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고기가 달아나려는 방향을 감지한 그녀는 재빨리 낚싯대 끝을, 마치 연싸움 할 때 얼레에서 상대방 연줄을 끊기 위해 줄을 튕기듯, 바깥쪽으로 튕겼다. 

어리둥절한 고기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오히려 처음 바늘털이할 때처럼 우리가 자리한 제방이 있는 쪽으로 또다시 머리를 돌렸다. 
 틈을 탄 그녀는 잽싸게 낚싯대를 곧추세우고는 허리를 활처럼 뒤로 젖히면서 고기를 둑 쪽으로 서서히 끌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듯 물고기는 급기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수면 위로 몸을 비스듬히 누이면서 커다란 주둥이를 뻐끔거리고 몇 차례 바깥 공기를 들이켰다. 
부레 속에다 공기를 가득 채웠던지 고기는 육중한 몸매를 부끄럼도 없이 드러내고는 서서히 끌려 나왔다. 

그녀는 낚싯대를 오른손 하나만으로 간신히 지탱하면서 재빨리 손수건을 꺼냈다.
물에 적시려 몸을 숙이려다 그때까지 뜰채를 쥔 채 우두커니 서 있던 나에게 손수건을 넘겨주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얼른 수건에 물을 적셔 와요." 

손수건을 건네받아 들고 저수지 물에 담그려던 내 코끝에서는 순간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운 그녀의 향긋한 살 냄새가 안개 더미처럼 피어났다. 
물에 적셔도 지워지지 않는 감미로운 향취에 취한 듯 젖은 수건을 들고 그녀의 다음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가까지 끌려 나와 옆 지느러미를 꿈틀거리며 눈과 주둥이를 껌벅거리는 고기는 거대한(월척보다 한 치 정도는 더 큰) 참붕어였고, 끝내는 그녀가 자리 잡은 받침대 밑까지 끌려 나왔다. 
그녀는 낚싯대를 잔뜩 움켜쥔 채 마지막 힘을 다해 버티느라 내가 조금 전 수건에서 맡았던 현기증 나는 체취가 짙은 땀방울이 흥건한 이마를 훔치며 지시했다. 
"빨리 수건으로 고기 눈을 가려요." 

그녀는 계속해서, 낮춤말을 쓰는 게 부담이 되는지 때때로 말의 높이를 달리했다. 
그때까지 충직한 종의 자세로 기다리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경건한 의식을 치르는 제사장처럼 커다란 눈망울의 물고기 머리를 그녀의 체취가 짙게 흩어지는 수건으로 마치 붕어의, 부끄러움을 가려주듯 덮었다. 

두 손아귀에 넘치도록 육중한 자태에 행여 놓칠세라 수건에 덮인 붕어 머리를 조심스럽게 움켜잡고 있는 동안, 그녀는 간데라 불빛에 낚싯바늘을 뽑은 후 살림망을 벌리고는, 잡은 고기를 넣는 것을 도와주었다. 

그녀가 다시 떡밥을 뭉쳐 낚시를 던지는 사이 10여 분 동안 붕어와 씨름을 하느라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된 그녀에게서 풍기는, 방금 손수건이 내 코끝을 스칠 때 느꼈던 현기증 일으키는 체취가 몽롱한 『한여름 밤의 꿈』속으로 잡아당기는 듯한 착각 속에 빠뜨렸다. 

낚시 자리로 되돌아가지도 못한 채 멍한 모습으로 굳어져 뚫어지게 자신의 옆모습을 훑어보고 있던 것을 느꼈는지 붉어진 귓불로 민소매 가슴을 여미면서 천천히 낚시 의자에 몸을 묻었다. 
머리에서는 마치 먼지가 뽀얗게 이는 한낮에, 끝없이 길게 이어진 신작로를 따가운 햇볕을 머리에 이고 혼미해진 발자국으로, 길을 걷는 것 같은 멍한 현기증이 한참 동안 났다. 

 아지랑이처럼 피어나 물잠자리 날갯짓으로 제자리를 찾아 조금씩 지워지며 흩어지는 그녀의 체취에서 깨어나듯 비틀거리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 후 밤의 어둠보다 더 무겁고 어색한 침묵의 벽이 둘 사이에 완고하게 자리 잡았다. 
가끔 오던 어신도 끊겨 버렸고, 잠 못 이룬 풀벌레 소리와 누구넨지 외양간 소가 되새김질하는 더운 콧김 소리만 간혹 들릴 뿐 사위는 고요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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