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어화(解語花) 한 송이로 아침을 열다
해어화(解語花) 한 송이로 아침을 열다
  • 성광일보
  • 승인 2022.09.16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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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란교 / 논설위원
송란교

비가 굵게 내리는 아침이었다. 월말이 가기 전에 우편물을 보내야 하는 출판사의 일정이 있어서 다른 회사와의 미팅을 하루 미루고 출판사로 출근했었다. 비가 오니 봉투에 넣은 귀한 옥고들이 비에 젖지 않게 우체국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 문제였다. 한 직원이 저보고 ‘내일 보내면 안 될까요’ 하는 것이었다. ‘비가 와도 우체국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문제없이 할 테니 오늘 무조건 합시다. 오늘 못하면 내일 저 없이 하실래요?’라고 퉁명스럽게 말을 뱉었다. 그렇게 뱉고 나니 마음이 아팠다. 굳이 그렇게까지 쏘아붙일 일은 아니었고, 오늘 못하면 내일 다른 직원들끼리 알아서 하도록 맡겨 놓으면 될 일 아닌가 말이다. 후회와 반성이 교차하는 마음 아픈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암튼 비가 오니 방수천을 준비해야 했다. 마트에 가서 사와도 되련만, 사무실에 있는 가장 큰 일회용 봉투 옆을 터서 이리저리 스카치테이프로 붙였다. 다섯 개 정도를 이어 붙이니 제법 쓸만한 비닐 천막이 되었고 아쉬운 대로 500여 권을 실은 수레를 뒤덮을 수 있었다. 비가 조금 순해지니 재빨리 우체국을 향해 뛰었다. ‘이에서 땀이 나도록’ 서둘렀다. 그렇게 500미터쯤 떨어진 우체국에 도착하고 나니 비가 다시 사납게 내렸다. 어휴! 그나마 다행이구나, 감사할 일이구나 하는 마음이 앞섰다.

월말이 다가오면 매양 같은 일을 반복하지만, ‘퉁명스럽게 내뱉었던 말’ 빼고는 모두 잘 되었다. 앞으로는 어떠한 경우라도 하기 싫은 듯 화난 듯한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입단속을 잘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기쁜 선물은 모두를 행복하게 한다’. ‘사랑을 표현하면 아름다운 이웃이 몰려온다’라는 말을 야금야금 생각해보았다. 말이란 여하튼 이해보다는 오해가 더 빠르다는 사실이었다.

이른 아침 사무실에 출근해서 차 한 잔을 마시고 있자니 그 맛이 참으로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밥 한 끼니를 대신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차를 마시고 있는 동안에는 머릿속이 개운해지고 배도 불러오는 느낌이 있어서 기분이 상쾌하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마시는 차는 왠지 배부름을 가라앉히는 느낌이지만, 이렇게 새벽에 마시는 차는 빈속을 다독거려주는 느낌이 있어 더 좋다.

빈 공간에 무언가 채워가는 느낌, 빈 종이에 무언가 써 내려가는 느낌, 빈 시루에 찹쌀가루가 쌓이는 느낌, 모래시계 속 모래알이 줄줄줄 흐르며 삼각산을 만드는 느낌, 부족한 듯한 허기짐을 달래주는 느낌, 행복을 싣고 오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감 등등, 이런 기분 좋은 느낌을 불러오는 차 한 잔은 참으로 고소하다. 초저녁 빈속에 들이켜는 소주 한 잔은 뱃속을 온통 흔들어 놓지만, 이른 아침 빈속의 차 한 잔은 뱃속을 편안하게 해준다. 졸리는 아이가 포근한 엄마 품에 안기려는 그런 맛이다.

‘예쁜 말 경험을 쌓아라. 말을 끊으면 관계도 끊어진다. 단 한 줄로 전달력을 높여라. 평범한 표현이 비범한 울림을 가져온다. 넘치는 감동은 평범함에서 온다. 연한 표현과 진한 감동, 강한 표현과 약한 동감. 천방지축 아이들의 붙임성과 까탈스러운 어른들의 조심성. 언어의 그물망. 하늘이 온통 해어화(解語花) 향기로 물든다면’. 등등 이런 잡다한 생각과 ‘당신이 필요해서 사랑한다는 것은 미숙한 사랑이며 사랑하니까 당신이 필요하다는 것은 성숙한 사랑이다’(윈스턴 처칠)라는 말의 의미를 되새김하면서 차 한잔으로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했다.

예로부터 아름다운 여인을 폐월. 수화. 침어. 낙안. 경국지색(傾國之色). 단순호치(丹脣皓齒). 설부화용( 雪膚花容). 화용월태(花容月態) 등으로 표현하였다. 특히 중국의 4대 미인이라 부르는 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를 ‘침어(浸魚), 낙안(落雁), 폐월(閉月), 수화羞花)’에 빗대었다.

‘침어(浸魚)’는 서시(西施)가 호수에 얼굴을 비추니 물고기들이 넋을 잃고 헤엄치는 것을 잊어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다는 것이다. ‘낙안(落雁)’은 왕소군(王昭君)을 지칭하며, 기러기가 하늘을 날아가다 왕소군을 보고 날갯짓하는 것을 잊어 떨어졌다 하여 붙여졌다. ‘폐월(閉月)’은 초선(貂蟬)을 지칭하며,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는다’는 뜻이다. ‘수화(羞花)’는 양귀비(楊貴妃)의 별칭으로, ‘꽃들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법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이른 아침에 ‘해어지화(解語之花)’(나의 말을 이해하는 꽃)를 생각하면서, ‘이해는 가까이 오해는 멀리’하는 하루가 되기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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