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한여름 밤의 꿈(8)
[장편소설] 한여름 밤의 꿈(8)
  • 성광일보
  • 승인 2022.09.16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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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동
시인·소설가,
성동문인협회 이사
김욱동/시인·소설가

"아버지가 가장 신임하던 간부직원이 신제품 개발로 급격히 늘어난 거액의 판매대금을 장부를 조작해 빼돌리고는 해외로 달아나 버렸고 자금줄이 막힌 회사는 결제 대금 등으로 몇 차례 파산의 고비를 넘기며 어렵게 버티다 연이어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해 도산해버렸어." 
그녀 역시 어색한 침묵이 거슬리는지 어둠의 휘장 너머로 어느새 제자리를 찾기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구획되게 낮아진 말을 던져 왔다. 
 "여기저기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아버지는 식구들을 우선 입이라도 굶지 않게 하시고는 가방 하나를 들고 달아난 직원을 찾아 외국으로 가신지 거의 일 년이 다되었어."
"..........................."
"어머니와 동생은 강원도 정선의 할아버지 집에서 손바닥만 한 농사를 도우면서 지내고 난 여기서 맥없이 아버지의 소식만 기다리고 있지." 
청도 넘어가는 팔송 재 마루에서, 이따금 새벽 흩어지는 소리가, 새소리에 섞여 들리자 부옇게 빛이 흩어지는 동녘을 보며 그녀는 낚싯대를 걷기 시작했다. 
"내일 또 나올 거니?" 
 잠시 생각하다가 머리를 긁었다.
"글쎄, 잘 모르겠심더" 
잠시도 지울 수 없는 대입 준비 염려 등 함부로 기약하기 힘든 처지의 아쉬움을 자락에 길게 깔면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내일 밤에도 네가 나온다면 나도 올게." 
"야, 그럼 내일은 이슬 피할 천막이라도 갖고 오겠심더." 
풀숲 등에 두었던 낚시도구들이 이슬에 젖어 축축해진 것을 털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가져온 커다란 낚시용 파라솔이 이모 집에 있어 내가 가져올게." 
짐을 다 챙긴 그녀는 물속에서 꺼낸 살림망을 가지고 오더니 잔챙이 열 서너 마리가 놀고 있는 내 그물 속에다 월척 붕어를 넣었다. 
"와 안 가지고 갑니꺼?" 
그녀는 하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내일 또 잡지 뭐" 
그 말에 뭐가 그렇게 우스웠던지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을 마을 사람들을 깨우려고 작심이라도 한 듯 껄껄 웃으며 나도 살림망을 수면 위에 거꾸로 세웠다. 
커다란 돌덩이를 던지듯 '풍덩'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월척 붕어는 물속으로 사라졌고 나머지 놈들도 자유를 찾아 새벽 수면을 흔들었다. 
"그런 붕어는 이곳에서 만나기 어려울 텐데?" 
그녀는 나보다 더 놀란 눈으로 나를 보더니 자신도 까르르 웃으며, 먼저 올라가 기다리다 잡아 주는 손이 이끄는 대로 새벽이슬에 젖은 방죽 위로 올라왔다. 

-흔적

"니 한 잔 더 먹어라." 
조금 전 설탕 탄 막걸리를 입에 부어 넣다시피 억지로 잔을 대었던, 누나 뻘 이라는 애가 자신들의 대화에 부스스 일어나 귀를 기울이는 눈치가 보이자 다가와 잔을 내밀었다. 
강하게 손사래 치면서 짐짓 그네들의 대화엔 관심이 없는 양 아직 취기를 이기지 못하는 몸짓을 과장하며 벽 쪽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러자 두 사람 쪽을 염려스럽게 보고 있던 동생이 얼른 여자애의 잔을 받았다. 
"우리 형 오늘 처음 마신 거다. 안 묵을라는 사람 주지 말고 여기 술 고픈 사람이나 많이 도" 
"이 머슴아 이제 보니까 순전히 술고래네. 코 비뚤어지게 많이 처먹은 니는 고만 묵고, 네 형이나 더 묵게 놔둬라." 
그때 조금 전 담배를 피우던 남자애가 그 여자애 엉덩이를 소리가 나도록 철썩 때리며 킬킬거렸다. 
"가시나 니 엉큼한 생각 하제? 그라모 못 쓴데이." 
"문디 머슴아 머라카노? 무신 엉큼한 생각 말이고?" 
"니, 재식이 따라온 부산아 술 취하면 따 묵을라꼬 수작 부리제? 히히히" 
모두 배를 잡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지랄하네. 머슴아야. 웃기지 마라카이" 
민망해진 여자애는 그 남자애의 등을 소리가 나게 쥐어박았다. 
"아이고 저 가시나 얼굴 빨개지는 것 오늘 처음 본다" 
그러나 그 소동에도 내가 취한 듯 별 무반응으로 돌아누워 버리자 심드렁해졌는지 모두가 조금 전 얘기를 찾아 돌아갔다. 
여자애는 자신의 무안함을 감추려는 듯 다른 애들의 관심을 지난해 내가 하룻밤 낚시로 인연이 새겨졌던, 그래서 일 년 동안 뇌리에 꽉 차도록 그리워하며 초조하게 기다렸던 선아의 이야기를 계속하며 얼버무렸다. 
"그 선아 가시나를 누가 대구 시내에서 보았다 카더라" 
"누가? 대구 어디서 봤다던데?" 
다른 여자애 하나가 언제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지 그동안 지키던 침묵을 깨고 이야기 속으로 끼어들었다. 
"누가 그러던데 대구 백화점 옆 반월당 부근에 있는 다방에서 보았다, 카드라" 
방 안의 분위기는 일순간 새로 등장한 애의 입술로 긴장하며 집중되었다. 
"작년 가을, 제 이모 '곡성 댁'을 뛰쳐나간 후 서울로 올라갔다는 소문이 온 동네 쫙 퍼졌는데?" 
또 다른 사내 하나가 소식통임을 자처하며 거들었다. 
"그건 잘 모르겠고 좌우간 누가 반월당 근처 다방에서 선아를 봤다고 하드라" 
"누가 봤다는데?" 
궁금해진 외사촌 동생 재식이도 친구들 얘기 속으로 들어왔다. 
"와 대일에 사는 '일수'라고 춤쟁이 있잖아? 늘 기생오라비처럼 하고 다니는”
“그래 그 건달 말이가?”
“응 그 일수가 작년 크리스마스 밤 어떤 아줌마하고 춤추다 차 마시러 다방에 갔는데, 그곳에서 갸를 만났단다”
“참말이가?”
“그래, 그 뒤에 우리 오빠에게 놀러 와서 하는 얘기 다 들었다.”
“맞다 너거 오빠하고 '일수' 그 건달하고는 친구제?”
“응, 그래 맞다. 그라고 선아가 우리 앞집 '곡성 댁'에 있을 때 일수 오빠가 사흘이 멀다 하고 대일에서 버스 타고 우리 집에 놀러 온기라”
“뻔하지 머. 고 가시나 한번 자빠트리려고. 보리쌀 소쿠리에 생쥐 드나들듯 들락날락한 거 아니가?”
“그래 참말이다. 그때 일수 오빠는 우리 집에 올 때마다 하이칼라 머리로 빗어넘기고 포마드 기름도 떡칠하듯 바르고 구두도 파리가 미끄러지게 광을 반짝거리게 내고 왔다. 
 그리고 올 때마다 내 선물도 얼마나 많이 사 왔는데, 선아 고 가시나 꼬셔서 집에 데리고 오라고”
“그래 그 새끼 한동안 잿 말로 뻔질나게 오더니만 선아 그 가시나가 이 동네서 사라지고 나니까 그 뒤로는 눈탱이도 안 보이더라”
“그래, 그런데 일수 오빠가 우리 오빠에게 카는데 선아 갸, 눈을 못 뜰 정도로 예뻐 보이더란다”
“선아 걔 원래 예뻤잖아? 키도 후리후리하고 몸매도 날씬하고.”
한쪽 구석진 자리에서 줄곧 담배를 피우던 사내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응, 그런데 그날 화장까지 하고 있는걸 보니 일수 오빠 말로 환장하게 예쁘더란다. 옆에 다른 여자만 없었으면 말이라도 하며 꼬셔 볼 텐데, 그 세계에서 밥줄 끊어질까 봐, 어쩔 수 없이 꾹 참았단다”
못 위쪽 마을에 산다는 여자애의 말이 뜸을 들이자, 방 안의 모든 눈은 나의 귀처럼 그 입이 열리기를, 초조히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뒤 그 다방에 다시 갔더니 선아는 그만두었는지, 다른 다방에 갔는지 좌우간 안 보이더란다” 
방안 모두의 입에서 아쉬워하는 탄식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끙하며 숨죽여 앓는 내 신음을 가려주었다.
선아를 낚시터에서 처음 만난 작년 여름, 방죽 너머 팔송 재 마루부터 새벽이 열리던 시간 촉촉하게 젖은 선아 손을 잡아끌며 방죽 위로 오르면서 그 날 밤에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었다. 
그리고 낮 동안 낚싯대 등을 준비하며 밤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외삼촌 집 마당으로 노기를 감추지 못하며 들어서는 아버지와 누나에 붙들려 꼼짝없이 부산으로 끌려갔었다. 
 시골 친구와 중요한 약속 있다면서 이틀 뒤에는 틀림없이 따라가마고 통 사정을 했지만, 아버지의 노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학 입시를 앞둔 학생이 학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고 따지다 급기야는 누구와 무슨 약속이냐고 날카롭게 추궁하는 가감 없는 원칙주의자인 누나의 논리를 당할 수 없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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