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한여름 밤의 꿈(9)
[장편소설] 한여름 밤의 꿈(9)
  • 성광일보
  • 승인 2022.09.27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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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동
시인·소설가,
성동문인협회 이사
김욱동

그날 밤 못가에 피는 물안개 속을 헤집고 다시 코끝을 간지를 선아의 현기증 나는 체취의 아련한 기대도, 밤을 밝히며 선아와 쌓을 몽롱한 『한여름 밤의 꿈』도 아프게 접으며 부산으로 갔다.
그때부터 대입 시험 때까지는 고3이면 누구나 겪어야 할 어려운 과정과 비록 잠깐이지만 여름 방학 동안의 가출로 뒤처진 학과과정 몫까지 감당하느라 코피를 쏟을 지경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입시 몇 달을 앞두고는 담임선생님과 학교 입시담당 교사에게 통사정하여 등교도 하지 않고 독학할 수 있도록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
그때부터 서면에 있는 시립도서관이 문을 여는 꼭두새벽부터 밤 10시 도서관 문을 닫을 때까지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찬합 두 개에 꾹꾹 눌러 담은 식은 밥을 삼키며 교과 전 과정을 피 튀기듯 파고들었다.
요행히도 어렵사리 대학진학에 성공하고는 벼르고 별러 학기가 끝나자마자 다시 이곳 삼산에 온 것이다.
행여 오늘 밤에라도 못 가에 피어날 『한여름 밤의 꿈』이 되살아나는 파란 케미라이트 불빛을 보고 찾아올 것 같은 그녀의 모습은 지난 일 년 내내 지워지지 않고 심성 깊숙이 각인된 그리움이었다.
비록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그녀의 현기증 나는 체취는, 마법과 같이 어쩌면 두렵고도 달콤한 유혹으로 남아 갈증의 허기를 단단하게 붙들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 밤, 마을 친구들과 어울린 동안 잠시 모습을 드러내던 선아의 흔적은 메케한 모깃불의 알싸한 연기 속으로 자취를 감추며 다시 미궁에 빠졌다. 

 
4. 재회

“어쩌나, 술을 많이 먹었네.”
길가 공터에서 헛구역질로 괴로워하고 있을 때 누군가 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딘가?' 
시간은 또 얼마나 흘렀는지 토막토막 끊어지는 사고능력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다. 
외삼촌을 만난 뒤 초저녁부터 마을 버스정류장 곁에 유일하게 있는 구멍가게에서 술과 과자들을 사서 외사촌 동생 재식이를 따라 못 위쪽 외딴집으로 갔었고 마을 비슷한 또래들과 어울려 먹지도 못하는 술을 강권에 못 이겨 마신 기억이다.
설탕에 탄 막걸리를 먹고 취기에 헤매다 선아 얘기가 나오자 정신을 가다듬으며 마을 청년들의 얘기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선아의 흔적이라면 낱낱이 주워 퍼즐 맞추기에 골똘했다.
잠시 자취를 보이다 다시 묘연해진 선아 행적으로 종결되고 실마리가 토막 나자, 마치 자신을 허물듯 대취하도록 마신 것까지도 생각났다.
그 후 또래들과 어울리던 집 대문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 간다며 나왔을 때 물안개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아래쪽 못이 흐릿한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곤 지난해 여름 그 못에서 선아와 지낸 하룻밤의 일들이 몽환적으로 피어나는 물안개 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자,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걸음으로 흡사 님프의 손짓처럼 부르는 아래쪽 제방으로 비틀거리며 다가갔다.
작년 선아와 함께 밤을 보내던 방죽 밑 낚시 자리에는 아무도 없음을 넋을 놓고 한참 동안 확인했다.
외사촌과 친구들이 기다릴 위 뜸으로 되돌아가려다 발길을 돌렸다.
신발에 자갈이 툭툭 채는 깜깜한 비포장길을 따라 조금 전 얘기토막에서 건져 기억에 묻어두었던 대구행 막차 시간이 임박했음이 생각나자 삼산동 버스정류장으로 위태로운 걸음으로 달려간 기억이 어슴푸레 이어졌다.
하지만 그다음부터는 연결점이 도무지 나타나지 않는다. 
지금 있는 곳이 분명히 가창 시골이 아닌 대구 큰 대로변이다.
서문시장까지 오는 막차로 내린 곳에서 삼산행 버스 운행 노선에 들지 않는 반월당까지는 꽤 먼 거린데 정신없이 온 것 같다.
통금시간이 되었는지 길에는 차들도 거의 다니지 않았고,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 어디쯤인가 야경꾼 호각 소리만 어둠을 들쑤시며 쏘다니고 있었다. 
비가 오려는 여름철 습한 무더위를 피해 길가에 돗자리를 편 노인들이 잠들었는지 가끔 모기를 쫓느라 부채를 펄렁이며 누운 것을 제외하고는 한가한 여름밤이었다. 
또다시 속에서 처 받쳐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어, 도로변 화단에 토하고는 잔디밭에 벌렁 드러누워 하늘을 보았다. 
눈가엔 눈물이 번져 주위 형상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홀로 그래픽처럼 춤추며 어른거렸다. 
“술을 많이 먹었나 봐.”
조금 전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면서 말을 이었다. 
“어서 집엘 가야지 이걸로 닦아요.”
“고맙심더. 여기가 어디?”
부릅뜬 눈으로 건네준 손수건으로 번진 눈물을 닦고 입가를 훔치려는 순간 들이쉰 숨을 멈추고 그 여인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지난 일 년간 지워도 지워도 사라지지 않았던 『한여름 밤의 꿈』처럼 못가에서 만났던 체취가 입가를 닦으려던 손수건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선아!" 
"..........................?"

수년 전 공덕동 로터리에서 우연히 만났던 고등학교 친구를 따라 재경동창회 모임에 처음 나갔을 때였다. 
일부러 세기를 더하듯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학창시절 부산 얘기에 꽃을 피웠고 모두 그만그만하게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에서 잊고 있던 지난날을 얘기 속으로 끌어내며 되살렸다.
처음 모임에 나간 날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내가 그날 화재의 주인공이 되었다. 
반가운 얼굴들을 몇 차례나 둘러보며 졸업 후 30여 년 동안의 삶을 담담하게 구술해 나갔고, 힘든 시절을 지나던 얘기를 할 땐 친구들 대부분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을 표하였다. 
모두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사는 곳도 서울, 성남, 의정부, 인천 부근, 안양, 분당 등 제각각이다. 
 순서에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 어느 친구가 자신의 직업을 소개하면서 '나는 개 선생이다'라는 말을 해 한동안 무슨 말인지 모두 어리둥절한 사이 그 친구가 자기 직업이 '개 조련사'를 한다는 설명에 모두가 술상을 두드리며 배가 아프도록 웃음을 참지 못하기도 했다. 
학창시절 얘기들과 비슷한 또래쯤인 한창 자라는 자녀들 얘기와 사업 얘기 등으로 꽃을 피우며 자연스럽게 술잔이 돌았다. 
그때까지 입에 대지 않던 술이기에 돌아오는 잔마다 마다했고, 가끔은 못내 아쉬워하는 친구들 표정을 읽으며 지나치게 몰인정하게 구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개중에는 학창시절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던 친구도 두엇 있었는데, 그들의 서운해하는 눈치는 남달랐다. 
하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습관처럼 입에 대지 않았던 술을 먹기엔,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은 신념에 가까운 결단이 그들의 아쉬움보다 더 컸었다. 

공식적인 모임이 거의 끝날 무렵에는 대부분 기분 좋게 취한 상태였다.
서초동 한정식집을 나와 헤어질 시간이 되자, 방향이 같은 친구들 끼리끼리 여러 종류의 교통수단에 동승 하며 다음을 기약하고 헤어지기 시작했다. 
몇몇 친구들은 2차를 가는지 의기투합하는 친구들끼리 어울렸는지, 미진했던 왁자지껄한 얘기를 길잡이로 앞세우고 갔다
대부분 친구가 떠난 후 행여 하며 집이 같은 방향의 친구들을 둘러보는데, 그때까지 학창시절 형제같이 가깝게 지내던 두 친구가 남아있었다.
미안해하는 어색한 미소로 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그중 인규란 친구가 불쑥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우리도 어디 다른 곳으로 2차 가자" 
 "......? 어디로?" 
"응 네가 동창회 나오기 전까지 둘이서 가끔 들렸던 곳인데 이따금 네 얘기도 하며 들리던 주점이 있어. 조그맣지만 아담한 곳인데 주인 마담이 참 매력적인 여인이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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