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 끌텅, 옹이 가슴을 품다
배추 끌텅, 옹이 가슴을 품다
  • 성광일보
  • 승인 2022.09.3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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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란교/논설위원
송란교

뜨거운 여름은 가라. 신선한 바람이여 오라. 그 바람에 실려 김장철도 따라올 것이다. 주인장은 여름내 품고 살찌우고 길러낸 통통한 배추포기를 보면서 언제쯤 뽑아낼까, 시세는 좋을까 이리저리 재보기는 하지만, 올여름 긴 장마에도 사나운 태풍에도 잘 견뎌내 준 푸르딩딩하고 황소 엉덩이보다 더 넓적한 배추포기를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도회지로 실어 보내는 날이 언제일지 몰라도 딸아이 시집보낼 날 받아놓은 것처럼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잘 여문 배추 한 포기 뽑아 올리면 밑동아리에 매달려 있는, 아니 끌텅이 배추포기를 이고 있었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한 달 동안 수염 한 번 깎지 않고 몇 날 동안 숟가락질 한 번 못해 홀쭉해진 모양의 배추 끌텅도 뽑혀 나온다. 백일도 채 지나지 않은 아이의 주먹으로 지게 위의 발채 보다 더 큰 갓을 받들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자기 몸통의 백배는 넘을듯한 배춧잎을 업고서 한여름 땡볕을 이겨내며 늦은 가을을 야금야금 갉아 먹으며 살찌운 것이다. 그 배추 끌텅을 낫으로 자르고 깎아서 한 입 베어 물면 그 맛이 무엇이더라? 인삼 한 뿌리와 바꿀 수 없는 진한 향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어린 시절 추운 겨울, 호롱불 밑에서 기나긴 밤을 보내자니 허기진 배를 무엇으로 달랠 수 있었을까? 삶아놓은 고구마도 없을 때는 배추 끌텅이라도 맛보아야 잠을 잘 수 있었다. 그 흐릿한 옛날의 추억들이 하얀 머리카락 하나둘 뽑아내며 그 자리를 차지한다. 찬 서리 맞아 얼 둥 말 둥 하여 시원하고 맛있다는 기억이 새삼 꿈틀거리며 혀끝을 찌르고 있다. 깎아 놓으면 무와 비슷하다. 색깔도 그렇고 맛도 그렇다. 다만 배추 끌텅은 더 단단하다. 그 조그만 뿌리로 하늘과 땅의 기를 온통 끌어모으기 위해 더 깊게 뿌리 내리고 더 강하게 견뎌내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무보다는 작지만 훨씬 더 단단하고 향 또한 진하다.

‘끌텅’은 나무의 그루터기나 배추 뿌리 따위의 깊이 박혀 있는 부분을 이르고, ‘옹이’는 나무의 몸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를 뜻한다. ‘굳은살’을 비유적으로 표현할 때 ‘손바닥에 옹이가 박히다’라고 하며, 가슴에 맺힌 감정 따위는‘옹이가 지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밑동’은 긴 물건의 맨 아랫동아리, ‘그루터기’는 초목을 베고 남은 밑동(뿌리그루)을 말한다. 나무를 베면 밑에 두꺼운 뿌리 부분만 남는데, 이것을 그루터기라고 한다. ‘관솔’은 송진이 엉긴 소나무의 가지나 옹이를 뜻한다. ‘근성(根性)’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성질, 뿌리가 깊게 박힌 성질을 말한다. 사람에게는 근성이 있다면 나무에는 옹이가 있고 돈 되는 땅에는 알박기가 있다.

끌텅은 옹이를 품을 수 있을까? 아낌없이 주는 나무에도 옹이가 박힐 수 있다. 끌텅과 옹이 그리고 관솔은 모두 무언가 응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응집되는 동안 더 단단해지고 더 굳세어진다. 갱엿처럼 다려진 송진들이 가지를 뻗치다 만 그곳 옹이 속으로 들어간다. 나뭇가지의 몸체 일부가 잘려나간 아픈 기억을 잊지 않고 응축시켜 놓은 흔적이라고, 옹이도 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옹이나 관솔은 나무의 결이 곧게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그 주위를 돌아가게 할 정도이니 목수의 톱날이 겁을 낼만도 하다.

거듭하고 반복된 부딪힘에 굳은살이 배기듯 인생의 옹이도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과수원 주인은 상처 있는 과실이 더 맛있다 하고, 꽃을 가꾸는 농원 주인은 비바람 이겨내며 자란 꽃의 향이 더 짙다 하고, 실패를 경험한 사람들은 성공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공할 수 있는 근성이 박혀 있는 것이다.

삶에도 옹이가 있다. 흔들리지 않으면서 피는 꽃이 없듯, 실패 없이 성공하는 인생도 없다. 실패에도 정성이 필요하다. 뿌리 깊은 티눈이 쉽게 빠지지 않듯 깊게 박힌 옹이를 뽑아내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끈기 있게 도전하여 끝내 이겨낸다면 그 실패했던 옹이들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로 남는다.

나를 더 단단하게 단련시켜주는 그 옹이의 시간을 넘는 동안 잠시 쉼을 할지언정 포기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실패한 사람은 성공할 때까지 세상에 보이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덜 자란 배춧잎이 볼품없으면 그냥 갈아엎는다. 노끈으로 묶고 신문 등으로 싸는 품삯이 더 많이 들게 생겼으니 주인의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 떠나면 관심도 떠난다. 아니 관심을 두지 않으니 사랑이 떠나는 것은 아닐까?

아무리 두꺼운 옷을 입고 있어도 누군가의 손을 잡고 있지 않으면 그 체온을 느낄 수 없고 추위를 탈 수밖에 없다. 따뜻한 내 손을 부지런히 먼저 내밀자. 나는 꽃처럼 아름다운 사람인가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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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신 2022-10-03 14:28:27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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