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니가 세어 봐
[수필] 니가 세어 봐
  • 성광일보
  • 승인 2022.11.07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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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률 / 수필가, 성동문인협회 이사
박병률 / 수필가

손자 은호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포도밭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이리 와보세요. 포도가 많이 떨어졌어요.”

나가보니, 포도송이가 이빨이 빠진 것처럼 드문드문 비어있고,?콩알만 하게 자라던 포도알이 땅바닥에 떨어져서 수북이 쌓여 있었다.
올해 포도가 처음 열렸다. 은호랑 포도 한 송이씩 고른 뒤 '포도가 익을 무렵 누구 것이 더 많이 달렸을까?' 내기를 해서 그런지 은호가 관심이 컸다.

“할아버지, 포도가 안 떨어지고 다 자라면 포도송이가 엄청나게 커서 좋잖아요.?많이 먹으니까요?”
“할아버지도 어렸을 땐 은호처럼 생각했단다.”

초등학생인 은호가 하는 말에 내 어릴 적 모습이 떠올랐다. 시골에 살 때 장독대 옆에 포도나무가 있었는데 해마다 포도가 주렁주렁 열렸다. '좁쌀만 한 포도가 다 자라면 포도송이도 늘어져서 팔뚝만 하지 않을까?'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해마다 포도가 콩알만 하게 자라더니 어느 날 절반 정도 떨어지고, 남은 포도알이 굵어지면서 포도송이도 크기가 서로 비슷해졌다. 추억이 남아 도시로 이사 온 뒤 텃밭을 만들고 한쪽에 포도나무를 심었다.

 “은호야, 포도가 작았을 때 더 크지 못하고 많이 떨어질까? 할아버지도 궁금하거든.”
 “그거야, 뭐. 자기들끼리 싸워서 이긴 놈이 살아남았겠죠! 처음에는 많았는데 반으로 줄었어요. 헐!”

은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답했다. 

 그 후로 시간이 흘러 콩알만 하던 포도가 다 자라서 보라색으로 물이 들었다. 그 무렵 은호 손을 잡고 포도밭으로 갔다. 
“은호가 찜한 포도송이부터 몇 개 달렸나 세어볼까? 은호 거 마흔여덟개네.”

 다음에 내가 골랐던 포도송이를 바라봤다.
 “포도나무는 자기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 때로는 비우고, 비워야 몸집이 커져서 속이 꽉 찬다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았을까….”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포도송이를 바라보는데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몇 년째 입지 않는 옷이 아까워서 버리지 못해 장롱 속 깊이 넣어 두고, 부와 명예를 위해 뭔가 비우지 못하고 가슴에 품고 있는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으므로. 포도가 눈동자처럼 동글동글해서 많은 눈이 나를 바라보다시피했다. 

포도나무는 해마다 자기 살점을 도려내듯, 여물지 않은 포도를 미리 절반쯤 버리건만, 나는 오랜 세월 동안 버리지 못하고 가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포도나무를 바라보는데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 내가 버리지 못한 것보다 포도나무가 떨쳐낸 포도가 더 많을듯했다. 그래서 포도를 세다 말고 은호한테 말했다.
“은호야, 할아버지 포도는 니가 세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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