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밤의 꿈(11)
한여름 밤의 꿈(11)
  • 성광일보
  • 승인 2022.11.07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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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욱동/
시인·소설가,
성동문인협회 이사
김욱동

"그래? 그분도 부산 사람인가?"
"아닌데, 서울 토박이 말씨인데, 하기야 여자들은 변신의 천재들이니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런 눈치는 안 보였어."
"얌마야, 마담도 낚시를 좋아한다지 않았어? 그러니 가게도 온통 그렇게 장식을 해 놓은 거지" 
"그런가?" 
창식이는 머리를 주억거렸다. 

택시는 그리 멀지 않는 곳의 골목을 몇 차례 드나들더니 이면 도로에 자리 잡은 「수궁」이란 조그맣지만 정갈해 보이는 간판 앞에 멈췄다. 
잠시 머뭇거리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친구들의 시선이 나를 찾자 차비를 치르고는 열린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 밝지 않은 실내조명에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한차례 내부를 돌아보는 순간 신음 같은 탄식이 이 사이로 저절로 새 나오는 것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실내는 대학에 입학하던 해, 여름비 오는 새벽 대구 칠성시장 쪽방에서 밤새 곁을 맴돌았던 선아의 체취 같은 몽환적 프레지어 향기로 가득했다. 
크고 작은 민물낚시 찌를 부챗살 모양으로 곳곳에 장식한 실내의 정면 벽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작은 소류지를 확대한 흑백 사진이었다.
어둠에 익숙해지는 동공 따라 자세히 바라보면서 그것은 삼산에서 청도를 넘어가는 팔조령 아래에 있던 그 작은 댐이었음을 알았을 때, 주방 쪽에서 조심스러운 걸음새로 다가오는 여인이 있었다. 
겨우 상대의 얼굴을 식별할 지점까지 여인이 이르는 것을 친구들 맞은편 자리에 앉으면서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었다. 
 "욱아 정신 차려라, 뭘 그렇게 홀린 사람처럼 보고 있냐?" 
의아해하는 인규의 목소리를 묶어두려고 얼른 고개를 벽 중앙에 걸린 사진으로 돌렸다. 
 "응 저 걸려있는 흑백 사진이 무척이나 눈에 익어서다." 
 "그래? 거기가 어딘데?" 
 "글쎄, 이전에 내가 낚시하러 갔던 작은 댐 같기도 하고." 
인규가 창식이와 담배를 꺼내 무는 동안에 카운터와 주방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땐 여인은 보이지 않았다. 
 "야, 마담 어딜 갔냐?" 
인규의 고성에 얼굴 가득 애교가 쌩글거리는 여자애가 다른 테이블에서 쪼르르 달려왔다. 
 "오셨어요? 어머, 오늘은 다른 분도 모시고 오셨네요. 항상 두 분만 다니시더니 호호호" 
 “얀마, 그래 오늘은 셋이다. 왜 같이 오면 안 되냐? 참 아니지 모시고 왔지 귀한 분이니 각별하게 모셔라.”
 "그런데 어째서 마담이 안 오고 네가 오냐? 언니는 어디 갔냐?”
창식이가 홀 안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쳐다보자 여자애는 살짝 눈을 흘겼다.
 “아이참 난 사람 취급도 안 하신다니까. 늘 언니만 찾고, 주인 언니는 방금 급한 전화 받고 잠시 나가셨어요.”
인규가 감기려는 눈을 껌벅거리며 졸음을 쫓았다. 
 “야 이놈 봐라, 공갈치네, 아까 들어올 때 카운터에 있던 거 얼핏 본 것 같은데”
 “들어오실 그때 연락받고 바로 나가시는 길이었어요. 곧 오시겠죠. 여태 한 번도 영업 중엔 안 나가시는데 어쩐 일인지 모르겠어요.”
여자애는 연신 쌩글거리는 웃음으로 주문을 받았다. 
맥주와 양주 그리고 과일과 마른안주 등이 테이블에 놓이는 동안 둘러본 「수궁」은 작은 못 속에 잠긴 고요하고 비밀스러운 정원 같았다. 

계산대와 테이블마다 꽂힌 노란 프레지어에서는 가창서 청도 넘어가는 팔송 재 밑 방죽에서 한여름 밤을 전율케 했던 선아의 살 내음을 되살아나게 하였다.
다음 해 대학생이 된 여름 방학 때 설탕 타서 마신 막걸리에 몸을 가누지 못하게 취한 채 마지막 버스로 무작정 대구 시내로 나왔다.
식이네 집에 모여있던 마을 친구들 얘기 속에 등장한 선아가 있었다는 반월당 거리를 헤매다 길가에서 토하고 있을 때 어깨를 두드려 주던 여인의 손수건에서 맡았던 체취에서, 선아를 알아보았던 또 다른 한여름 밤. 
이틀 치의 비밀을 고스란히 봉인한 판도라의 상자처럼, 전설 속 침몰해버렸다는 대륙 애틀랜타처럼, 물밑으로 가라앉아 똑같은 시간, 똑같은 시대를 스치면서도, 타인처럼 비켜 앉아 살아온 두 사람의 시간이 「수궁」이라는 이름의 교차점으로 남겨져 있었다.

해군 영관급으로 제대한 창식이가 서해 해전 주(酒)라는 폭탄주를 조제 하여 몇 차례 돌리는 동안 묵묵히 주어지는 데로 술잔을 비웠다. 
 인규와 창식이는 도리어 근심스러운 얼굴로 서로 눈짓하며 내 차례를 건너뛰었다. 
“어이! 너희 두 놈 날 왕따시키냐? 억지로 잡아끌 땐 언제고." 
 "그만해라, 욱이 넌 술도 못하잖아?" 
인규는 염려가 되는지 처음 술을 안 먹는다고 비아냥거리던 것과는 딴판으로 술을 금하였다. 
조금 전 마담이 다가오다 사라진 홀 한가운데를 바라보면서 정색을 하고 창식이와 인규를 노려봤다. 
"파계를 권하다 정작 옷을 벗으니 비구니가 왜 그러냐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하 하하 좀생이들처럼.”
“......................??”
“나도 너희들 만나서 좋다. 밤새워 마셔보자" 
"너 진정이냐?" 
인규는 이곳으로 이끈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는지 연신 표정을 살폈다. 
"야 인마 매를 맞더라도 스스로 엎드린 장 틀 위에서 맞으면 아픔이라도 덜 할 것 아냐? 그만 굴려라, 알량한 주판알"
인규와 창식이의 눈 사인이 몇 차례 오가는 것을 감지하면서도 무시한 채 몇 잔 더 마시자 그제야 포기한 듯 학창시절 무용담(?)을 안주 삼아 대작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까지 사라진 마담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세 사람의 술기운도 끝 지점으로 치 닫았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오는 틈을 타, 입구에서 몇 번이나 기회를 기다린 듯, 지금껏 세 사람의 시중을 들든 종업원이 몰래 쪽지를 건넸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앉았던 자리에 가기 전 조심스럽게 쪽지를 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선아' 

-회상

『한여름 밤의 꿈』을 찾아 삼산동에서 반월당으로 나와 선아를 찾아 헤매던 30여 년 전 두 번째 여름밤도 오늘처럼 몸을 가누지 못할 지경으로 취해 있었다. 
마을 친구들과 어울리다 선아의 흔적을 만났고, 처음 먹은 설탕 막걸리로 취해 대구 시내를 배회하다 이마에 힘줄이 돋아날 지경으로 부릅뜬 눈으로 건네준 손수건에서 맡았던 그녀의 체취에서 담박 선아를 알아본 그 날 밤도 오늘처럼 대취했다. 

30여 년 전 프레지어 향 가득한 칠성시장 허름한 점포 2층에 줄지어 늘어선 쪽방에서 선아 팔에 매달려 난생처음 여인의 방에, 일 년 동안 가슴속에 잠시도 못 잊을 그리움으로 자리 잡고 있던 선아의 방에 갔을 때처럼, 
조립식 비키니 옷장 곁 앉은뱅이책상에는 몇 권의 책과 함께 작은 물병에 노란 프레지어가 꽂혀 있었다.

한여름 밤의 열기에 개똥지빠귀 새처럼 호로록 호로록 코끝을 간질이던 선아의 살 내음에 취한 그날 밤처럼, 끝없이 펼쳐진 프레지어 벌판을 한 마리의 나비가 되어 헤엄치듯 누볐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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