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립 도서관 수필] 고추 벌레
[구립 도서관 수필] 고추 벌레
  • 성광일보
  • 승인 2023.03.28 18:1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현주
시인, 성동문인협회 감사
김현주

<성동글향기 구립도서관 은빛문단>

얼마 전 학교급식 열무김치에서 죽은 개구리가 나왔다는 텔레비전 보도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열무는 농약을 하지 않았거나 적게 한 채소는 아니었을까? 그래도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사전에 철저하게 검열해서 하였다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밥을 먹다가 아이들이 얼마나 놀랐을까? 내가 어렸을 때 겪었던 일이 할머니가 된 지금까지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 아이들도 그리되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새벽에 운동하러 나가보면 아침노을이 유난히 붉을 때가 있다. 아침노을이 붉은 여름날은 태양 빛이 더 강렬했다. 엄마는 그 빛을 조금도 놓치지 않으려고 서둘렀고, 그 태양 속에 엄마가 말리던 달큼한 고추 냄새가 섞이기도 했다.

고추 하나가 온전히 말라서 태양초가 되어 우리의 밥상에 오르는 열무김치에 섞이기까지 엄마는 굵은 땀방울 대여섯 바가지는 족히 흘렸으리라. 호미가 닳도록 풀을 매는 엄마 손톱은 풀물이 들어 늘 까맣고 몸은 흙냄새 풀냄새로 범벅이 되었다. 아마 열무를 키우던 농부도 그랬을 것이다.

고추가 다 자라 우거지면 풀이 크지를 못한다. 그때부터는 호미를 놓고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묶어주었다. 한여름 뙤약볕에 고추가 익어 붉어지면 엄마 피부도 붉은 고추가 되어갔다. 숨이 턱턱 막히는 고추밭에 엉거주춤 앉아서 붉은 것만 따다가 멍석 위에 널어놓았다. 최고의 상품으로 만들기 위해 뙤약볕에서 하나하나 돌려가며 말렸다. 제대로 마르지 않고 곯으면 고추가 허옇게 희아리 져서 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고추와 한몸이 된 엄마 몸에서는 줄재채기 터지는 매운 고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젊은 나이에 아버지와 사별한 엄마는 홀로 자식들을 키우며 가르치기 위해 저토록 온갖 고된 삶의 냄새를 몸에 안고 살았다. 고추를 최상급으로 만들어가다가 비가 오면 행여 고추가 곯을까 봐 노심초사하며 방에 널어놓았다. 그렇게 방바닥을 다 차지한 날은 고추를 피해 한쪽 구석에서 꾸부리고 자는데 옆구리가 뜨끔했다. 잠결에 만지니 손에 물컹한 게 잡혔다. 나도 모르게 비명과 함께 순식간에 옷을 벗어 던지고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고추 위에서 풀떡풀떡 뛰며 악악 울었다. 엄마는 무섭지도 않은지 맨손으로 잡아 마당에 던지면서 "이깟 애벌레가 잡아먹냐? 자다가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하고 야단을 치면서도 나를 꼬옥 안아 진정시켜주었다. 그뒤로 엄마는 고추가 곯아도 내가 자는 작은방에는 고추를 널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부터는 애벌레만 보면 소름이 돋고 무섭다.
하물며 TV 화면에서 꾸물거리는 애벌레가 있는 장면이 나오면 애벌레가 화면 밖으로 기어 나올 거 같아 채널을 돌린다. 그 정도로 나는 살아있는 애벌레를 너무 싫어하고 무서워한다. 그래서인지 나에겐 애벌레로 인한 사건이 많다.

집에서 채소를 다듬다가 애벌레가 나오면 "애들아" 하고 집이 흔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부른다. 이런 코미디가 어디 또 있을까? 엄마는 딸을 위해 고추 벌레를 맨손으로 잡아 던졌는데, 나는 아이들한테 잡아내라고 시키다니 어미 체면은 안중에도 없다.

한번은 생태찌개 하려고 다듬다가 꿈틀거리는 애벌레를 보고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칼과 생태 토막이 사방으로 날아간 적이 있다. 그 뒤로는 지금까지 생태를 사지 않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겨울에는 마늘에서 새 뿌리가 나온 걸 모르고 까다가 하얀 뿌리들이 고물고물 애벌레인 줄 알고 놀라 얼결에 손에 들고 있던 걸 내던지며 얼어붙었다. 놀란 남편이 와서 보더니 뿌리를 보고도 놀라는 바보라고 놀려 멋쩍기도 했다. 
이런 우리 집 이야기가 대문 밖을 나갔는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동네에서 물건을 파는 아줌마가 있었는데, 그 아줌마는 시골에서 올라와 13평 아파트의 작은방 하나를 세 얻어 여섯 명이 한방에 살면서 집 앞에서 장사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힘든 내색 없이 항상 밝은 얼굴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며 열심히 사는 게 엄마를 닮아 보여 좋아했다. 아파트 출입구에 물건들을 펼쳐놓고 장사하면 지나다니기 불편할 텐데도 같은 서민들이라 그런지 아무도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물건들을 사주고 느티나무 아래 쉼터처럼 아줌마 옆에는 늘 사람들이 모여 수다도 떨었다. 채소를 사면 아줌마가 같이 다듬어 주었다. 다듬다가 애벌레가 나오면 자지러지게 놀라니까 나 때문에 심장 떨어지겠다고 나무란다. 

시골에서 자라고 두 아이도 낳은 사람이 채소를 다듬기 싫어 일부러 무서워하는 줄 알았을까? 어느 날 소금 한 봉지를 샀는데 거스름돈은 이따 준다면서 배달 가기에 소금 봉지를 들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배달 갔다 온 아줌마가 거스름돈이라고 주먹 쥔 손을 내밀기에 무심코 받았는데 돈이 아니고 커다란 깨 벌레가 손바닥에서 꿈틀댄다. 비명과 함께 뒤로 벌렁 나자빠진 나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손바닥을 옷에 문지르며 눈물을 줄줄 흘리니 아줌마가 더 놀라 일으켜 안아주며 진정시켰다. 손에 들고 있던 소금은 이미 땅바닥에 널브러져 소금을 새로 담아주면서 '애벌레를 정말로 무서워할까?' 하고 궁금해서 그랬단다. 정말로 미안하다면서 괜한 짓을 해 소금값만 날렸다고 계면쩍게 웃었다. 그 뒤로 아줌마는 내가 애벌레를 진짜로 무서워하는 걸 인정하고 벌레 먹은 채소를 사면 모두 다듬어 주었다. 그렇지만 손바닥에서 깨 벌레가 꿈틀대던 느낌은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 손바닥을 옷에 문지르는 버릇이 생겼다.

잠자리나 매미 나비 등, 수많은 곤충은 무서워하지 않고 손으로 잡기도 하면서, 뼈도 없고 힘도 없어 느릿느릿 기어 다니는 애벌레는 왜 그렇게 무서워 벌벌 떠는지 사람들이 의아해한다. 우세스럽고 창피해 무섭지 않은 척이라도 해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지만, 애벌레만 보면 반사적인 반응을 어찌할 수가 없다.

오래된 기억은 희미해지거나 잊히기도 하는데,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어린 시절에 고추 벌레 사건이 없었다면 애벌레를 무서워하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내 옷에서 고추 벌레를 집어 마당에 던진 엄마의 처절한 자식 사랑을 아직도 모르는 걸까? 

여름이면 도시의 복잡하고 딱딱한  회색 건물과 소음을 떠나 아늑한 산속 계곡에서 시원한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휴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럴 때면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에 동화되기도 하고, 바닷가 하얀 갈매기에 매료되어 새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하고, 하늘에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면 여행 가고 싶은 마음을 기러기 날개에 슬쩍 얹어 보내기도 하면서, 어미 새가 애벌레를 물어다 새끼들을 키우는 모습을 어쩌다가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보면 무서워 눈이 찡그리는 이 모순덩어리를 어떡하나.

생태계를 건강하게 보존하고 서로 공존하며 살아가는 방법은 없을까? 오늘도 나는 애벌레와 간격을 좁히지 못하고 딜레마에 빠지면서, 열무김치에서 벌레가 나와 놀랐을 그 아이들은 나처럼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서울 특별시 광진구 용마산로128 원방빌딩 501호(중곡동)
  • 대표전화 : 02-2294-7322
  • 팩스 : 02-2294-7321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주연
  • 법인명 : 성광미디어(주)
  • 제호 : 성광일보
  • 등록번호 : 서울 아 01336
  • 등록일 : 2010-09-01
  • 창간일 : 2010-10-12
  • 회장 : 조연만
  • 발행인 : 이원주
  • 자매지 : 성동신문·광진투데이·서울로컬뉴스
  • 통신판매 등록 : 제2018-서울광진-1174호
  • 계좌번호 : 우체국 : 012435-02-473036 예금주 이원주
  • 기사제보: sgilbo@naver.com
  • 성광일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성광일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sgilbo@naver.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