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립 도서관 수필] 간월도 가는 길
[구립 도서관 수필] 간월도 가는 길
  • 성광일보
  • 승인 2023.03.28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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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수필가, 성동문인협회 회원
김경숙

멀리서 반가운 손님들이 왔다는 전화를 받은 것은 밤 아홉 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이미 간월도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앞서가던 서너 대의 차량을 무심코 따라간 지 얼마나 됐을까? 하나둘 불빛을 흐리며 샛길로 빠지는가 싶던 차들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고, 암흑과도 같은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생각이 든 것은 한참을 더 지나서였다. 저수지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안개가 백발처럼 휘감아 돌며 시야를 가렸다. 폐건물과 무덤에서는 금방이라도 무언가 튀어나올 듯했다. 가로등 하나 없는 도로,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길,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닌 듯 차는 자꾸 앞으로만 내달렸다. 

나는 왜 앞서가던 차들이 나처럼 간월도로 가는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을까? 겁에 질려 차를 돌릴 엄두도 못 내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곳은 도대체 어디쯤일까? 마치 천국과 지옥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았다. 어쩌면 천국과 지옥 모두 안개 속에 숨어서 내가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게 거부하는 것도 같았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숨이 멎을 것 같은 공포가 엄습하자 살면서 지은 죄, 저지른 잘못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한 번쯤은 잘했다고 생각될 일도 있을 만한데, 그런 기억은 도무지 없고 용서를 구할 일만 꼬리를 물었다. 잘못인 줄 알면서 되풀이한 일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만약 신이 지금까지의 삶으로만 나를 평가해 지옥에 보낸다면, 억울해서 응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마무리하지 못한 현재진행형인 일들의 결과 또한 나를 평가하는데 중요한 부분이 되어야 했기에, 이렇게 도중하차로 내 삶이 멈추는 불상사는 어떡하든 막고 싶었다. 

언젠가 송년회가 끝나고 귀가하던 새벽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갑자기 내린 폭설로 굽잇길을 운전할 자신이 없었던 나는 서해대교로 방향을 틀었다. 그런데 진입하자마자 후회했다. 사납게 몰아치는 바람이 금방이라도 차와 함께 내 몸을 바닷속으로 밀어 넣을 것만 같았다. 차선을 바꾸고 속도를 늦춰도 차체의 흔들림은 변함이 없었다. 오가는 차량이라도 있었으면 위안이라도 됐을 텐데, 그 시간 서해대교 위에는 내 차만이 홀로 바람 속에 휘청댔다. 그대로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민들레를 건네주던 아들 시우의 해맑은 얼굴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이들의 정다운 모습도 떠올랐다. 잘해준 마음이나 좋은 기억보다 못 해준 일들만 가슴을 때렸다. 무사히 다리를 건너 소중한 이들을 다시 만나면, 가장 먼저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시 아침을 맞이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아쉬움을 줄이고 후회를 줄이리라 다짐했다. 무사히 다리를 건널 수만 있다면!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이곳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안개 속이다. 두려움에 떨며 서해대교를 건너던 그날은, 예기치 못한 폭설에 폭풍까지 몰아쳤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비슷한 공포 속에 비슷한 생각으로, 비슷한 후회를 하고 있다. 서해대교를 건널 때 그렇게 많은 다짐을 했으면서 실천하지 못하고, 이렇게 다시 위기를 모면하려는 몸부림이라니 아, 나는 얼마나 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인가! 

“왜 이렇게 늦어요?” 휴대전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때까지 휴대전화기 생각을 못 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만약 휴대전화기를 생각했다면 바로 도움을 청했을 테고, 그랬다면 이렇게 앞으로만 내달리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는데, 아무도 물어가지 않았는데 정신을 놓은 꼴이다. 

차를 돌려 익숙한 길로 접어들었을 땐, 기운이 빠져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어간 그곳은 '산동'으로 가는 길이었다. 간월도 가는 길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무엇에 홀리지 않고서야 그런 길로 빠질 수는 없었다. 의심 없이 따라갔던 몇 대의 차량, 유혹하듯 앞서가다 샛길로 빠진 그 차들이 정말 존재했는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미래, 예기치 못한 사고가 특정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나만은 예외라는 착각 속에 살았다. 삶을 다하는 순간이 언제인지조차 알 수 없으면서, 준비 없이 사는 어리석음을 반복했다. 그러나 똑바로 살라는 경고를 거듭 받고도 잘못을 되풀이한다면, 그땐 영원히 세상에서 퇴장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폭풍 부는 날 서해대교 건너지 말기, 눈 오는 날 굽잇길 가지 말기, 해지면 앞차 따라가지 말기'하는 식의 얄팍한 마음 또한 버릴 일이다. 

비우고, 버리고, 나누고, 사랑하는 일에 인색하지 말아야겠다. 누가 나에게 손해를 끼쳐도 미움과는 친하지 말고, 상처를 주면서 얻는 행복은 쳐다보지도 말아야겠다. 내 수고가 선한 이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 또한 기쁘고 감사히 여길 일이다. 불시에 세상과 작별하게 되어도 두려움 없이 떠나기를 바란다면 말이다.

병든 육체에서 오는 두려움, 정신을 빼앗긴 상태에서 오는 공포, 그것은 모두 삶의 끝자락에서 느끼는 죽음의 공포다. 인간이 한계를 인정하고 최고로 겸손해지는 가장 인간다운 순간, 나는 간월도 가는 길에 그것을 경험했다.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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