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려상 : 산문>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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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광일보
  • 승인 2015.06.01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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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숙현<중곡4동 새마을 작은도서관>

장려상 : 산문> 

                       시간여행

                                             오숙현<중곡4동 새마을 작은도서관>

전란이 끝나고 왜적과 명군도 이땅을 떠나 부서지고 불타고 형체도 남지 않은 궁궐마다 중건사업이 한창이었다.

1616년 광해군 7년 드디어 창경국이 원래의 모습을 거의 되찾고 그 대역사를 하늘에 감사했다. 나는 그때 명정전 너른 뜰에 왕과 왕비, 왕실 가족과 문무백관이 축하의 연을 베푸는 자리 장악원 악사의 한 사람으로 앉아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높고, 그윽한 꽃향기는 손에 잡힐 듯 내게로 아주 가까이 머물다 가곤 했다. 그 꽃이름이 뭐였더라...

갖가지 꽃을 만들기도 하고 나무에서 꺾어 오기도 하여 궁궐뜰 곳곳에 화려한 자태를 뽐내게 했다. 악사들은 있는 힘과 정성을 다해 여민락, 수제천, 보허자, 수연장 등등 아름다운 궁중음악을 연주하니 황홀하기 그지 없었다.

모인 사람의 수도 수거니와 각자가 가진 가장 좋은 의복으로 치장하고 나왔으니 눈길을 어디로 돌려도 필시 꿈속이거나 하늘나라 잔치에 온 듯 했다.

나는 2013년 가을 어느 비내리고 쌀쌀한 날 오후 늦게 혼자 무턱대고 창경궁으로 향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나 혼자 창경궁의 단풍을 보기 위해서였다. 목적이 그러하니 홍화문에서 입장료를 낸 후 곧장 발길을 춘당지 쪽으로 옮겼다.

나는 그전까지 한 나무에 붙어있는 단풍잎들이 각각 다른 색으로 물든 것을 보지 못했다. 주황, 노랑, 붉은 색, 원래의 초록... 하도 신기하여 잎사귀 하나 하나 다시 보고 또 보았다. 몇 걸음 더 걸었더니 그 단풍잎은 손가락을 쫙 편듯 그 손톱부터 붉은 물이 들기 시작하는 것이 이제 단풍색으로 갈아 입으려 하니 몇날 며칠 지켜봐 주시오 하고 말해 주는 듯 하였다.

봄에는 꽃이 폈을 그 나무들마다 이젠 잎사귀들이 5장, 6장 모여 나를 꽃으로 여겨주오 라며 꽃잎을 펼치듯 펼쳐있고 그 빛깔 또한 옅은 살색으로 또는 붉은 색으로 물감이 들여져 있는 듯 하였다.

그리고 춘당지 연못물 위에 비친 하늘과 연못가 나무들과 연못 가운데 작은 섬에 빽빽히 서있는 나무들은 비내리는 물 위에 어른거리고, 눈을 들어 실제하는 하늘과 나무들은 풍경 사진이나 풍경화 속에서 방금 나온 듯 꿈인가 생시인가 구분이 안되는 신비로운 비경이 되어 내 맘을 꽉 채웠다.

창경궁의 가을은 내게 아주 특별한 기억의 첫장을 이렇게 열어주었다. 이듬해 봄이 되자 꽃은 또 어땠을까. 궁금하여 다시 창경궁을 찾았고, 며칠마다 한 번씩 꽃피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가을이 되어 단풍을 보러 몇번 가고 싶었지만 한번 가보았다.

조선의 왕들, 왕비들, 왕가의 생활에 대한 관심과 조선 역사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에 나는 책을 찾아 읽기도 하고 역사강좌를 수강하기도 했다. 그런 노력을 기울이게 된 것은 내 나이 마흔에 우리 악기로 알려진 해금을 배운 후의 일이다.

해금은 고려가 몽고의 영향 아래 있었을 때 몽고의 부족 중 하나인 해족이 만들어 쓰던 악기로 고려와 조선의 궁중 악기로 어떤 편성을 해도 빠지지 않는 관악기이자 현악기였다. 명주실 두 가닥이 활과 마주쳐 높은 소리를 내고 해금 안에 굵은 철기둥이 울림통 밖으로 철소리를 내주어 여느 국악기보다 더 먼 곳으로 소리가 퍼져 나간다.
해금은 민간에서도 연주되는 악기였다. 가장 천한 신분이었던 각설이들이 사람을을 모으고 구걸하기 위해 해금을 켰다고 한다. 고려든 조선이든 역사에 기록된 해금연주자가 있을 수 없으련만 조선 후기 유득공이라는 학자가 쓴<영재집>에는 유우춘이라는 해금연주자가가 등장한다. 유우춘은 어머니를 공양하기 위해 돈벌이 목적으로 해금을 켰는데 그 솜씨가 널리 알려질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그가 어머니 사후 해금을 더이상 켜지 않았다고 전해지는 것은 그당시 음악을 한다는 것은 그리 권장할 만하지도 보람있데 느껴지지도 않는 천한 일이어서였을까... 전문 연주자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부터였다.

나는 해금을 배우고 한 곡씩 알아나가면서 이런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고 감상했던 조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가 무척 궁금했고 그 호기심은 역사공부로 이어졌으며, 슬프고도 안타까운 역사를 끝으로 사라져간 조선이 음악으로만은 아직도 앞으로도 역사 속에 살아있음을 조금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조선의 음악은 이제 세계의 유산이지 않은가.

나는 전생을 읽어준다는 박 아무개를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런 직업이 있는 것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도 궁금해서 찾아가 보니, 삼십 초반쯤 되 보이는 화장기 없는 한 처자가 내 전생을 읽어주겠다며 앞에 앉아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분 가량 쳐다보던 눈빛을 거두고 혼자 생각에 잠겨있던 처자는 내게 이런 얘기를 해주었다. 내가 전생에 조선시대 악사였다고, 악사일 때 악기연주 만큼이나 궁궐을 좋아해서 그 다음 생에는 창경궁 백송으로 태어나 늘 나무들 곁에서 사시사철 꽃과 하늘을 벗삼고 살았다고.

그럼 그 다음생에는요? 그 백송이 번개를 맞아 죽었는데 하늘나라 가보니 너는 본래 음악을 하는 악사였으니 이번에 땅에 내려가면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통해 공덕을 쌓으면 다시는 후생에 지구별에 나지 않을 거라며 땅에 내려보냈고 그가 곧 나라는 것이었다.
내가 조선의 궁중악사였다고...?

참 그럴 듯했다. 박 아무개가 한 이야기를 몇번이고 되새기며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타고난 숙명의 길을 받들어야 하는 이유를 얻은 듯 마움이 다잡아졌다.

그랬구나. 내가 중학교 때 선교단이 부르는 찬양들과 예배시간에 부르는 찬송가가 좋아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일, 고등학교 때 친구 두 명과 중창단을 만들어 매일 연습하고 여기 저기 찬조출연했던 일, 대학생 때 교회 성가대에 지원해 열심히 노래부르고 봉사했던 일, 내 해금소리를 혼자 듣기 아까워해서 강의하러 다닐 때 가끔 강의 전에 해금연주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곁에서 늘 격려해주는 남편을 만난 일, 아마츄어의 소박하고 서투른 연주를 좋아해준 수많은 곤객들을 떠올려 보았다.

인생의 단 하나의 순간도 무의미하게 따로 떨어지지 않고 구슬을 꿰어놓듯 이렇게 맞아떨어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전생에 대해 들은 얘기가 터무니없는 허구일지라도 나는 그후 내 삶을 더 진지하게 바라볼 수 있는 설명 하나를 얻었다고 믿기로 했다.

시간이 갈수록 빨리 간다. 내 나이 마흔 일곱. 이제껏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아이 둘 낳아 키우고 남편 뒷바라지하는 것이 전부였을 것이 뻔하지 않았나.

그러나 감사하게도 나는 내가 전생에 걸었던 그 창경궁을 지금도 걸을 수 있고, 그 위에서 한결같이 아래를 내려다 본 하늘을 쳐다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른 새벽에도 늦은 밤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해금을 부여잡고 깊고 풍부한 음색으로 내가 아는 노래들을 연주하며 삶의 활력을 얻고 있다. 그렇게 연습하다가 관객들을 앞에 두고 시간 여행을 함께 떠난다.
패티김의 이별,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장윤정의 약속, 오드리 햅번의 문리버, 장악원 아니 국립국악원에서 연주해 주는 궁중음악들, 민속음악들, 창작음악들을 나도 조금씩 해금으로 연주한다.

음악은, 해금은 나에게 시간여행을 통해 삶을 더욱 풍요롭게 채색해주며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만물을 친구로 만든다.

내일 나는 스승의 날 축하모임에 축하곡을 연주하러 간다. 그 시간에 함께 시간 여행을 떠나려 한다.
2015년 5월 13일 어린이대공원에서

당선소감

백일장에서 체 삶을 정리하여 글로 표현할 수 있어 감사했고, 상을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우리 중곡4동 문고회원들과 응원해 주신 분들에게 이 영광을 돌리며, 내년에도 백일장에서 좋은 글 써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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