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 난공불락의 고구려 산성과 치(雉)
[역사기획] 난공불락의 고구려 산성과 치(雉)
  • 성광일보
  • 승인 2015.10.25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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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명우 <본지 편집위원회 고문/운룡도서관 이사장>

▲ 이명우<편집위원회 고문/운룡도서관 이사장>
광진구에는 아차산과 용마산에는 고구려 산성인 아차산성과 여러개의 보루가 있다. 우리나라는 3000년전 고조선시대부터 도읍지와 산에 주변국의 침략을 방어하기위하여 성을 쌓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고조선이후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및 신라는 서로 영토 분쟁 때문에 전쟁이 많았고 특히 고구려는 서쪽의 중국과 북쪽의 부여와 대치하고 있는 관계로 자연히 성을 쌓는 일들이 많았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는 산을 의지하여 성을 축조하였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킬 수 없다’고 나와 있다. 각 나라는 자국의 통치와 외적의 침략에 대비한 평지의 도성 뿐만 아니라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인 산속의 산성은 화강암이 주 자재가 되었고 이로인하여 성을 쌓는대 필요한 다양한 축성 기술이 발달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는 성곽의 나라라고 불릴 많큼 성곽이 많다. 남한만 하드래도 약 1,200여 군데가 있고 북한지역과 만주일대의 고구려 성곽을 합하면 무려 2,000여 군데에 이른다. 대부분의 성곽은 군사 요충지인 높은 산에있는 산성이고 평지에는 주요 마을 공동체인 읍과 행정지휘부가 있는 행정관청과 왕궁이 있는 위치 주변에 성곽이 자리잡고 있다.

돌의 특성상 석성을 쌓는데는 대규모 공사가 진행되어야 하고 석성 내부에 여러 가지 주거시설과 편의 시설이 들어서야함으로 공사를 위한 조직적인 체계와 인력 동원이 필수적이므로 대체적으로 국가 체제가 안정된 6세기 삼국시대부터 축성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석성을 쌓는데는 채석장으로부터 잘라낸 거대한 바위돌을 나르고 쌓는데 필요한 많은 수의 군사와 인부 및 운송수단과 거중기같은 축성 도구들이 있어야 한다. 더 나아가 거대한 바위를 일정한 크기로 자르고 다듬고 조각하는 석공과 조수 및 연장이 충분히 있어야만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성이 자연 재해로부터 무너지지 않고 적이 성을 공격할 때 성벽을 오르기 어렵게 함을 물론, 공성 무기인 돌대포(포석) 공격으로부터 성벽이 깨지지 않도록 충분히 견딜 수 있도록 축성 방법을 설계할 수 있는 전문 축성 기술자가 다수 있어야 한다. 최종적으로 처음 계획 단계부터 군사적 측면뿐만 아니라 행정적 사용에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성곽과 주변 시설을 설계하고 배치하며, 전체 토목 공사를 관리하고 지휘할 종합 토목 설계자와 공사 책임자가 있어야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에 산성이 많이 있지만 산성하면 고구려 산성이 축조기술이나 성의 구조에서 많이 앞서 있다. 고구려의 산성으로 대표적인 것이 중국 랴오닝성 환런현 오녀산에 있는 오녀산성, 평안남도 용강군의 황용산성, 평양의 대성산성 등이 있다. 남한에는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과 용마산에 남아있는 아차산성과 보루 등이 있고 충북 단양군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이 유명하다.

▲ 아차산 3보루의 치(雉) 구조
아차산성과 보루에는 고구려만 있는 독특한 치(雉)라는 성벽구조가 있다. 성벽에서 ‘치’란 구조는 성벽을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일직선 성벽에서 톱니바퀴의 돌출된 치(雉)처럼 'ㄷ‘로 성벽이 나와있는 구조를 말한다. 성벽에 치나 치성 구조가 있으면 성을 방어하는 성벽위 군사들이 성벽을 기어 오르는 적군을 활과 창이나 돌을 던저 적을 격퇴하기가 용이하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산성이나 도읍지의 성을 방어하는 군사적인 측면이나 과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으로 창안된 성곽 구조이다. 아차산성 및 보루외에도 고구려 산성에서는 ‘치’ 구조를 쉽게 볼 수 있는데 온달산성이나 요동 및 만주의 모든 고구려 산성에는 지금도 이 ‘치’의 구조가 남아 있다. 특히 산성의 치 구조는 중국의 장성에도 없는 구조이며 유럽에도 동로마제국이 멸망한후 14세기 오스만제국이 만든 터키 에페소스의 성벽이 치의 구조를 하고 있어 고구려보다 수백년 후에 성벽에서의 전투시 치의 구조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한것 같다.

고구려는 산성의 독특한 치(雉) 구조와 축조방법으로 요동성과 안시성은 중국 수(隋)나라 100만 대군에의한 1, 2차 전투에서 석포와 운제를 동원한 치열한 공성에도 불구하고 성이 함락되는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성(城)이 특별한 것은 일본과 중국 및 유럽의 성들이 주로 지배층을 위한 공간이었다면 한국의 산성은 지배층과 피지배층 모두를 위한 공간이었다.

평화시에는 평지성에서 생활하다가 전쟁이 나면 산성으로 들어가 농성하는 구조이다. 평지성이 함락당할 위험이 있으면 성안의 활용가능한 물자는 모두 산성으로 옮겨서 백성들과함께 산성에서 장기 항전하는 것이 우리 선조들의 수성전략이다. 서울의 성곽도 왕과 신료 및 백성들이 같이 사는 평지성이며 성이 함락되면 항전할 수 있도록 서울도성과 연계된 북한산성을 만들었다. 북한산성과 남한산성은 모두 군사와 백성들의 주거시설뿐만 아니라 왕궁도 있었다. 아차산성의 가운데에는 지금도 천제단과 건물터 및 커다란 저수조(貯水曹)가 남아 있다. 아차산성이 남한산성처럼 제대로 복원되어 고구려 석성의 위용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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