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털 저 뿔 예서 이뤄진 것 아니로구나 : 見牛 / 만해 한용운
세 번째는 동자승이 소의 꼬리를 발견한다. 견우란 소를 보았다는 것으로 우리의 감각 작용에 몰입하면 마음의 움직임을 뚜렷이 느낄 수 있으며, 이런 현상을 소의 꼬리를 보게 되는 것으로 풀이한다. 이는 소를 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선도의 세계로 도약하거나 도약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게 된다. 정체되어 있서는 발전이 없다. 발전이 되기 위해서는 처음은 눈으로 봄에 따라 생긴다. 시인은 한 걸음도 꼼짝 않고 저 놈을 보노라니, 저 털 저 뿔 예서 이뤄진 것 아니로구나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見牛(견우) / 만해 한용운
지금 다시 울음소리 들을 필요 있을까
위용 떨친 저 흰 소 푸른 풀 밟고 있네
털과 뿔 이뤄지지 않았네, 꼼짝 않는 저 소는.
至今何必更聞聲 拂白白兮踏靑靑
지금하필경문성 불백백혜답청청
不離一步立看彼 毛角元非到此成
불리일보입간피 모각원비도차성
저 털 저 뿔 예서 이뤄진 것 아니로구나(見牛)로 번안해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1879~1944)이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지금 다시 울음소리를 들을 필요 있을까 / 위용을 떨치고 가는 흰 소, 푸른 풀을 밟고 있네 // 한 걸음도 꼼짝 않고 저 놈을 보노라니 / 저 털 저 뿔 예서 이뤄진 것 아니로구나]라는 시상이다. 아래 감상적 평설에서 다음과 같은 시인의 시상을 유추해 본다. ‘울음 소리 들어야 하나 푸른 풀 밟은 저 소, 꼼짝 않는 저 놈 보니 저 털 저 뿔 예서 아닌데’ 라는 화자의 상상력을 만난다.
위 시제는 [드디어 소를 본다]로 번역된다. 시인이 찾고자 하는 소를 찾았다. 불가에서는 예불(禮佛)을 드리고, 가톨릭(기독교 포함)에서는 기도한다면 마음에서부터 다가오는 무엇이 있다. 검은 옷을 입은 사자(使者)가 아니라 흰 옷을 입은 ‘석가’나 ‘메시아’일 수도 있다.
시인은 소를 찾았던 그 기쁨은 형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찾았던 소일진데 지금 다시 울음소리를 들을 필요 있을까라는 물음을 은근히 던진다. 풀밭에서 위용을 떨치고 있는 흰 소가 푸른 풀을 밟고 있네 라는 만족을 보인다. 찾음과 찾아냄, 찾으려는 동(動)적인 행위와 찾아냄이라는 정(靜)적인 만족감도 조화를 이룬다.
그렇지만 화자는 만족하지 못하고 허탈감에 빠진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그려보려고 했다.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꼼짝하지 않고 있는 소를 보고 있노라니 [저 털 저 뿔은 예서 이뤄진 것 아니로구나]라는 허탈감이다.√ 불가에서는 견우(見牛)를 다음과 같이 기린다(頌). [노란 꾀꼬리가 나뭇가지 위에서 지저귀고(黃鶯枝上一聲聲) / 햇볕은 따사하고 바람은 서늘한데 언덕 버들은 푸르다네(日暖風和岸柳靑) / 더 이상 이곳을 빠져서 나아갈 곳이 없나니(只此更無回避處) / 위풍당당한 쇠뿔은 차마 그리기가 어려워라(森森頭角畵難成)]
【한자와 어구】
至今: 지금. 何必: 어찌 반드시. 更: 다시. 聞聲: 소리를 듣다. 拂: 떨치다. 白白兮: (소가) 희고 희다. 踏: 밟다. 靑靑: 푸르고 푸른 풀밭. // 不離: 떠나지 않는다. 一步: 한 걸음. 立看: 서서 보다. 彼: 저. ‘소’를 가리킴. 毛角: 털과 뿔. 元: 원래. 非到此成: 이곳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