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땡큐 !

김정숙의 북치고 장구치고

2018-07-25     성광일보
김정숙

스위스 루체른 호숫가 음식점에서 화장실에 갔는데 남자와 여자 화장실의 구분이 독일어로만 써있고 성을 구별하는 로고가 없었다.
한쪽은 HERREN, 한쪽은 DAMEN.
동시에 화장실 문 앞에 진입했던 나와 외국인 할아버지가 어느 쪽으로 들어가야 할지를 몰라서 잠시 멈췄다.
글씨의 생김새로 봐서는 DAMEN이 남성용인거 같은데 할아버지는 그래도 못 미더운지 들어가지 못하고 주춤하고 서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HERREN 의 문을 살짝 열어보니 남성용 양변기가 보인다. 오! Here!
바로 여기가 당신이 갈 곳이라고 알려줬더니 오? 땡큐! 땡큐!라며 자신은 절대 할 수 없었던 일을 해 낸것에 대해 무진장 고맙다고 한다.
까잇거, 이쯤이야 뭐.
나라를 구한것도 아닌데 뮐 그리 고맙냐고 으쓱했다. 화장실에서 있었던 해프닝을 굳이 얘기하는 건 내가 하려는 얘기의 적절한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상에는 예측이 맞는 경우도 있지만 예측이 맞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Damen' 이 'Herren' 보다 얼마나 영어의 Men처럼 남성스럽게 생겼는가?
이 경우가 아니더라도 나이를 먹으면서 늘어나는 말투 중 조심해야할 게 예측을 확신으로 말하는 버릇이다.
그럴것 같으니까 그렇다고 확신하거나 누군가 어떤 이야기를 했을 때 마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이 '그러니까'라고 말하는 말투도 그런거다.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았으면서도 자신은 애초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하거나 힘이 센 곳에 동승하며 자신은 애초부터 힘이 센 무리의 사람이었다는 듯 말하는 버릇도 살펴봐야할 자기관찰이다.
그런 버릇은 버릇이라고 하기엔 약하고 아예 몸에 체화되어서 자연스럽게 나오기까지 한다.
노화의 신체화 증상이 몸짓뿐만 아니라 말투까지 변하는 건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건 아마도 자신만의 세계로 세상을 보는 눈 때문인 것 같다.
외부세계와의 접촉이 줄어들면서 분명 다른 사안인데도 일반화하는 태도. 내 것이 늘 맞다는 놀라운 자만.
다른 세계를 보려 하지 않는 자기 폐쇄. 그로인한 고착의 틀이 말투까지 변해서 모든 사안에 대한 의문을 확신으로 일반화하는 것 같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건 두려움이다. 살펴보고 확신해도 될 만한 사안에 살펴보기를 두려워하는 마음, 그로인해 감당해야 하는 고통.
그런 것들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젊은 시절처럼 선뜻 살펴보는 것에 대한 용기를 못내는 거다. 두려움 때문에 용기를 못내는 건 그래도 이해할만하다.
그건 자기를 보호하고 싶은 인간 본연의 원초적 본능이니까 말이다.
문제는 고착은 벗어나는 게  쉽지 않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고착됐기 때문이다.
고착은 수년간 켜켜이 앉은 치석과 같아서 아무리 칫솔로 닥달하고 문대도 지워지지 않는다.
치석을 제거하는 끌이나 날카로운 쇠붙이로 힘을 써야 떨어질 수 있다.
치석과 같은 고착을 떨궈내는 일은 그래서 어렵다.
그 어려운 고착을 떼어내주려 애쓰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당사자가 순순히 치석제거 의자에  누워서  순순히 기다릴 수 있는가도 의문이다.
그런 고착의 치석이 낄 줄 알았다면 애초부터 고착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매일 번잡하지만 칫솔질과 치실과 치간칫솔로 고착의 원인을 제거하며 살았을 것이다.
고착의 틀에서 자유로운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사회적 관계는 불을 보듯 뻔하다. 늘 자신이 옳고 늘 자기 확신에 차 있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하겠는가?
그러므로 나이가 들수록 관계가 불편한 대상이 되고 있다면 그건 자기 고착으로 딱딱하게 굳고 있는 자신을 한번쯤 돌아보아야 할 기회다.
그런걸 놓치고 살아갈 때 사람들은 그런 사람을 꼰대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