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매체로 거른 ‘깨달음의 노래’

화정(和政)·화옹(和翁) 이계묵(李啓默)

2019-07-26     이원주 기자

사람만 있고 소(牛)는 없다

소타고
이미 집에 돌아오니

소는 없고
사람만 한 가롭네!

해는
석자나 떠 있는데

아직도
꿈꾸는가?

초당엔
고삐만 댕 글 엉! 있네, 구려!

騎牛已得到家山 牛也空兮人也閑
紅日三竿猶作夢 鞭繩空頓草堂間
                        <七,忘牛存人>

이계묵(李啓默)/화정(和政)·화옹(和翁)

이 게송은 길든 소타고 집에 돌아와서 늘어지게 자는 대목입니다. 소는 이제 잊어버리고, 해가 중천(中天)에 뜨도록 자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소는 경계(境界)아닙니까? 그 경계(境界)의 소가 바로 우리 마음의 심식(心識)에 비유 한 것이다.

육진경계(六塵境界)를 말한 것이다. 마음 공부하다보면 심식 경계(識心 境界)가 파도를 칩니다, 꼭 고삐 풀린 망아지 소 같습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설쳐 됩니다. 그 설쳐 되던 심식(識心)도 이젠 푹 쉰 것이다.

그래서 소는 없고 사람만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본래 마음입니다. 자성 청정심(自性 淸淨心)입니다.
옛날 임제(臨濟)스님 사료간(四料揀)에 보면 탈경 불탈인(奪境不奪人)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는다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여기서 탈(奪)은 뺏는다는 뜻입니다. 뺏는 것은 부정(否定)입니다. 불탈(不奪)은 긍정(肯定)을 말한 것이고요. 즉 법공(法空)을 말 한 것입니다. 우리 인식(認識)은 있다(有)는 것 아닙니까? 눈앞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있다는 것은 착각(錯覺)입니다. 그 점을 알아야 합니다.

착각(錯覺)을 착각(錯覺)인줄 모르는 것이 중생(衆生)입니다.있는 것이 아닌데, 있다고 고집(固執)하니까, 부처님이 법공(法空)을 말한 것입니다. 선사(禪師)스님들도 똑같은 말씀이죠. 여기서 망우존인(忘牛存人)은 법공(法空)을 깨달은 것을 말 한 것입니다.

임제(臨濟)스님은 사료간(四料揀)에 어느 때는 탈인(奪人不奪境)을 말하기도 합니다. 탈인(奪人)은 아공(我空)을 말 한 것이다. 선지식(善知識)이 후학(後學)을 제접(提接)하는 방법입니다.
경계에 집착한 사람은 탈경불탈인(奪境不奪人)으로 제접(提接)합니다. 아집(我執)에 빠진 사람은 탈인불탈경(奪人不奪境)으로 제법(提接)을 합니다. 근기(根機)따라 법(法)을 펴는 방법(方法)이다. 곽암선사의 일곱 번째인 忘牛存人은 겨우 법공(法空)을 깨달은 대목이다. 공부하다 아공(我空) 법공(法空)만 되어도 큰 공부입니다. 그러나 심우도(尋牛圖)에서는 아공(我空) 법공(法空)만으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앞으로 세 단계를 더 거처야 완전한 깨달음이고 부처의 회향(廻向)이라는 겁니다. 오늘은 망우존인(忘牛存人)이었습니다.
마음에 돌이켜 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