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착각은 자유라더니

황미라 / 성동문인협회 수필분과장

2020-03-25     이기성 기자
황미라

새날 아침이 되면 또 하루 평범한 일상이 시작된다. 그 날도 여느 날처럼 집안 일을 끝내고 식탁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깊은 울림이 있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왔다. 좀 더 가까이서 듣고 싶어 들뜬 마음으로 얼른 현관문을 여는데 소리가 뚝 그쳤다. 하지만 아직 저 공원 어딘가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복도에 서서 눈으로 샅샅이 둘러본다.

'서울 도심에 어떻게 왔을까, 이 작은 공원에는 왜 왔을까'그들이 살기엔 불모지나 다름 없는 이곳까지 와줘서 무척 고맙다. 오늘따라 공원을 채운 햇살이 유난히 말고 부드러워 오월 신록이 더 눈부시다.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소리를 예기치 못한 곳에서 듣게 되니 나는 나그네가 되어 이제는 이미지로만 남아있는 고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고향집 담 너머로 보이는 우뚝 솟은 산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다른 세상과 단절시키려는 듯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모르는 산 능선이 이어져 있다. 산 아래에는 그 산을 다 담을 듯 넓은 강이 있고, 강과 어우러진 풍성한 들판이 있다. 들판을 지나 신작로 앞에 선다. 구르마를 단 말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달려간다. 

길 양편으로 늘어선 오래된 플라타너스 가로수는 서로 만나 좁은 길을 터널로 만들었다. 그 길을 가로질러 촘촘히 구획된 밭을 지나면 자잘한 내 감정들이 뒤섞여 존재하는 우리 동네다. 

내가 살던 집은 그대로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없다. 대문 앞에서 기웃거리다 발걸음을 타작마당으로 옮긴다. 늘 동네 아이들 노는 소리로 왁자지껄했던 이곳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을을 지나 뒷산으로 넘어간다. 

온통 딸기밭이었던 언덕 너머에는 아주 넓은 공동묘지가 있다. 묘지는 너럭 바위와 이어지고, 그 바위 끝에는 산속 어디에서부터 내려오는 물과 논에서 흘러나온 물이 합쳐 흐르는 긴 도랑이 있다. 

빨래방망이 소리가 산을 울리는 동네 빨래터다. 봄나물 캐다 동면하는 뱀을 발견하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줄행랑 치는 아이들, 바지 걷고 도랑에서 미꾸라지 잡는 아이들, 풀 속을 지나가는 도마뱀을 갖고 노는 아이들, 엄마 옆에서 서투른 손놀림으로 빨래 돕는 아이들, 바위에 누워 햇빛 쬐는 아이들…' 내 친구 인숙이, 숙남이, 영자가 저 무리들 속에 있다.

흐뭇한 미소를 띄우며 산 속으로 걸어 가려다 발길을 멈춘다. 으스스하다. 더 이상 나아갈 용기를 내지 못하고 현실 세계로 발길을 돌린다. 아침에 첨 들었던 그 소리는 이후에도 간간이 들렸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작은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왔다. 간식을 먹고 있던 아이가 무심코 던진 말
"엄마, 어느 집에 뻐꾸기 시계 있나 봐."
"헉!"말문이 막힌다. 그렇다. 내가 아침에 들었던 소리는 며칠 전 이사 온 윗집 뻐꾹종 소리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나는 왜 진짜 뻐꾸기 소리라 단정지었을까? 착각은 자유라더니, 그 자유를 심하게 누린 대가로 나는 한동안 뻐꾹종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실없는 웃음을 흘려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