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 詩마당> 가을, 능내역에서

유병란 / 시인

2020-11-25     성광일보

        가을, 능내역에서
                                   유병란

나무 의자에 걸터앉아 졸고 있는 시간

승차권을 팔지 않는다는 안내문만이
얼룩진 시멘트벽에 덩그러니 붙어 있다

기차시간을 기다리며 몸을 녹이던 연탄난로와
흐릿한 시간표가 눅눅해진 기억들을 햇살에 말리고 있는 오후

마지막 열차가 지나고 난 뒤
해고당한 노동자처럼 방황했을 철길에 
쑥부쟁이 구절초 강아지풀 코스모스가 
옹기종기 모여 가을빛을 쬐고 있다

흰 양말에 흰 칼라 검정플레이어스커트를 입은 내 친구들이
재잘대며 역사 안으로 들어올 것도 같고
등짐을 멘 젊은 아버지가
맥고모자를 쓰고 서 있을 것만 같은 곳

늙은 남자의 초연한 얼굴처럼
빛바랜 간판을 훈장처럼 달고 서 있던 간이역에서
주름까지 닮아가는 친구와 철길을 걸어간다

부드럽게 이어진 곡선 따라
우리의 가을도 깊어간다

유병란

유병란

·성동문인협회 회원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