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 詩마당> 잉크, 겨울강가를 서성이다

이경호 / 시인

2021-03-12     성광일보

성동 詩마당잉크, 겨울강가를 서성이다
                                                    이경호

하얀 백지위에 떨어지는 잉크방울

종이사막에 다다른 발길은
더 깊은 모래밭으로 빠져든다
사방팔방 찢어지는 발가락 빼내지 못해 
끝 모를 나락,
평정심을 잃어버린 절망의 순간
매끄러운 유리의 나라를 기어가고
종이무덤 속에 또 하나 길이 열린다

적막의 시간이 숨 막히게 흐르는 동안
부식된 먼지들이 갈증을 호소하고
흩어진 육신조차 흐릿한 유리벽엔
물 한 방울 스며들 틈이 없다

붉은 장미 한 송이 올려놓는다
누구의 마음에도 가 닿지 못할 주절거림들
탈출할 수 없는 혼미한 정신 속에서 내미는 펜촉
새로운 백지를 꺼내놓고
언어는 꽃잎을 펄럭이며 하늘로 달아나고
귀를 세워 들어줄 그 아무도 없는 
노역의 반복
한 글자도 쓰지 못한 백지위에
푸른 빛 잉크가 생을 돌아보게 하는 탄소냄새를 풍긴다

종이가 걷어지고
책상 유리판이 닦아지고
흔적조차 사라져버린 잉크
언어를 잃어버린 잉카족처럼 겨울강가를 서성인다

<이경호>
·시인
·성동문닌협회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