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문화원과 함께 하는 성동이 기억할 땅과 사람이야기-(1)도선동 전길영

- 복숭아밭서 태어난 왕십리도선동 소년, 동민회 되찾고 마을유래비도 세워 - 헐려진 천년고찰 안정사, 49제 사진 등 근현대 성동의 삶 고스란히 남아

2022-01-13     원동업 기자

1.뼛속까지 왕십리 도선동 사람 전길영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이는 교보생명 창업주 신용호 선생의 말이다. 이 말씀을 오마주 삼아 다시 말하고 싶다. “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문화를 만든다”. 땅은 그 시대를 품고 있다. 땅의 생긴 모양과 그 위치는 그곳 사람들의 삶에도 영향을 끼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으로서의 땅, 이 땅에서 생겨난 문제에 적응하고 응전하면서 사람의 삶도 씨실과 날실처럼 엮인다. 우리가 함께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의 삶 역시 그 땅과의 인연을 따지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한해 동안 이곳 성동의 땅에 살았던 이들의 삶을 기록하려는 이유다. 그들이 만든 문화는 우리가 사는 땅에서 우리에게 양식으로 자라고 있다.

◆땅의 이야기 들려준 전길영 선생

2021년 내가 만난 가장 인상 사람 둘을 고르라면 '뼛속까지 왕십리도선동 사람 전길영' 선생과 마장동에서 순경-경찰을 하셨다가 은퇴를 하신 이상돈 선생이다. 두 분을 처음 만난 것은 모두 책에서였다. 아흔을 넘긴 전 선생님과 '그분 돌아가셨다 하던데' 했던(죄송합니다) 이선생님을 모두 현실에서 직접 만나 뵈었다. 그들로부터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며, 자료를 살피며 인터뷰를 하게 된 게 그래서 '신기했다'. 지난 12월 6일부터 10일까지 닷새간 열렸던 성동문화재단 성동별곡의 성과공유회에서 나는 이 두 분의 이야기를 전시했었다. 개관식날 참석하기로 사전에 약속했던 두 분이 모두 그 시기 '병상'에 누웠다. 그들은 이미 위태하게 삶과 죽음의 언저리에 있었다. 하루바삐 만나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길영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성동문화원이 매년 발간하는 책 <근현대 사진 이야기전>이었다. 2009년부터 매해 빼놓지 않고 발간해 왔으니 어느새 13권째다. 그 안에 자주자주 전길영 선생의 제공 사진이 있었다. 이상돈 선생을 처음 뵌 것은 서울역사박물관이 발간한 책 <마장동-수도권 최대 축산물 단일 시장>이었다. '2013 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축산시장과 마장동 사람들의 삶을 촘촘히 기록하고 있었다. 그 이상돈이란 이름을 다시 위 <이야기전>에서 만났다. 

전길영은 왕십리서 1928년에 났다. 지금은 헐린 전풍호텔 인근이 그의 집터였다. 당시엔 그곳은 세단쯤 되는 복숭아밭이었다. 그는 날리는 복숭아꽃 그늘 아래서 요람에 안겨 흔들렸을 것이다. 기자를 처음 만났을 때, 그의 일성은 '그리운 고향 왕십리'였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깔려 운행을 하는 곳. 미나리꽝 배추장다리가 지천이던 이곳에 눈과 몸이 큰 잠자리 천지가 무수히 날았다. 밤이면 개똥벌레들이 '빛의 군무'를 추던 곳이 여기 왕십리고, 도선동이었다. 

길영의 가족들은 대대로 서울에서 살았다. 전길영까지 13대째다. 하여 전길영은 서울토박이회 회원이다. 서울에 오직 하나 남아있는 중구의 토박이회를 그는 자주 찾았었다. 그의 조상은 나라의 녹을 오랜 동안 먹었고, 전길영의 부친 전명록은 왕십리에서 100여년 전에 이미 가게를 차리고 기업을 운영했다. '제일농원'은 왕십리에서 동대문으로 향하는 신작로에 자리를 잡아 장차 번성할 가문의 뼈대를 세우고 있었다. 현재 마장동 세림아파트 자리에 있던 한영중고등학교가 강동구 명일동으로 옮겨갈 때, 부친 전명록은 그곳에 소유하던 땅 전풍농장터 4,130평을 희사해 한영외고의 터가 됐다. 

동국대 46학번, 1회 졸업생 전길영은 1950년 전쟁이 터지자 장교교육을 받고 전장에 나섰다. 제대후에는 한창 그 시대에 첨단 산업이던 '자동차 수리'업에 종사했다. 그는 도선동장도 했다. 그가 동장을 하던 1963년, 자택에서 경로잔치를 열었다. 수염을 길게 단 할아버지들, 머리를 곱게 쪽진 할머니들이 자리를 채웠다. 당시에는 마을에 변변한 연회홀도 없던 때여서, 그의 부인 김정분 여사가 음식을 차려 냈다. 전길영의 동생 결혼식때 가족들이 모인 곳은 그네 집안의 가택이다. 예전에는 대청마루가 넓었는데, 거기 온 가족들이 모여 사진을 찍었다. 부인 김종분이 결혼 전 찍어서 갖고 있던 1946년의 왕십리 전차 사진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 시대의 기록이다. 보노라면, 시대의 기록이란 결국 사람의 한 살이임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왕십리2동 뒤편, 무학봉 근처에는 현재 수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다. 거기 왕십리kcc스위첸 아파트도 있다. 이 아파트를 들어가 외편 길로 오르면 거기 뒤편 절벽에 마애불이 서있다. 신라 흥덕왕 2년 827년에 지어졌다는 절 안정사가 헐리고 남아있는 흔적이다. 도선동의 동명은 신라 고승 도선대사에서 왔는데, 도선의 탄생연도가 역시나 827년이다. 앞으로 5년 뒤인 2027년이면 이 절(터)의 역사는 1,200여년이 된다. 

왕십리도선동에 또렷하게 남아있는 전길영 선생의 흔적은 도선동 동민회다. 이것은 전길영 개인의 기록만이 아니다. 200년전 영정조시대 산제치성제로부터 이어져 오는 마을축제와 제사의 흔적이기도 하다. 동민회가 있는 도선동 360번지는 한때 개인 소유로 뺏길 뻔했던 마을총유재산이다. 그걸 찾느라 전길영 선생과 도선동 사람들이 함께 나섰더랬다. 땅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함께 마을을 이루고 문화를 길러 다시 그네들이 사는 땅을 바꾼다는 증거가 여기 있었다. 

추신: 유튜브에서 <왕십리 고향 전길영 작사 김성수 작곡>을 검색하면 시인 전길영의 '노래가 된 시'를 들을 수 있다. <성동의 사람들_전길영_땅은 사람을 사람은 문화를>을 검색하면 전길영의 위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원동업 기자 <iskarma@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