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동 詩마당] 여름에 서다

이민희

2022-03-11     성광일보

   여름에 서다
                    이민희

#곡예사

아슬아슬 한껏 뻗는 호박 덩굴손
땅바닥도 하늘 끝도 멀다
바람에 흔들리는 몸통
무언가 잡아야 산다
맞은편 옥상 난간 닿을 듯 말 듯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내일은 팔을 더 늘려야지

#유혹
 
가늘게 하늘대며 나팔꽃 어린줄기
옆 고춧대 눈길을 내려 보면 한번 잡아 달라
천진한 척 유혹하며 기어오른다
오뉴월 볕을 넓게 펼쳐 든 잎들 
바람을 타고 요염하게 생글생글
창백해진 고춧대 비실비실 스러진다

#가위손

그녀의 손에 가위가 들리면 
힘차게 펼쳐가던 나팔꽃 덩굴들 
어찌해야 그녀의 눈길을 피할까 오금이 저리다
가차 없이 탁탁 쳐내고 돌아서는 
그 순간은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다 
사흘치만큼 잘라내는 가위손

- 시인
- 성동문인협회 이사